브런치에는 안 올리고 싶은 글
고향 방문기(2/24-25에 있던 일)
가족들과 오랜만에 여행 비슷한 것을 실행했다. 매번 본가 아니면 나와 동생의 자취방에서만 모였기 때문에 가족끼리 새로움을 즐겼던 경험은 너무나 과거의 것이었다. 친구들과는 드라이브, 간단한 데이트, 가벼운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족끼리 하는 경험은 늘 뒷전이었던 것 같아서 제안했다. 우리 당일치기라도 집이 아닌 곳에서 보내보자고.
그래서 거제도에 갔다. 부산도 선택지에 있었지만, 좀 멀고, 부산은 그래도 친숙한 느낌이라 군침 도는 히츠마부시를 포기했다. 거제도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안 되었고, 우린 11시 반에 있는 유람선을 타기 전 옆에 있는 바람의 언덕에 올랐다. 바람은 거셌고, 멀미가 잦은 엄마가 걱정되었다. 역시나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1시간 높은 파도 때문에 엄마는 검정봉지를 쥐며 투어를 마쳤고, 멀미를 잘하지 않는 나머지 넷은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주고, 남쪽 영해의 끝에 있는 섬들을 구경했다. 모든 것이 예상가능한 범위에 있었다.(심지어 엄마의 멀미까지도) 신선하고 짜릿하진 않지만, 이렇게 다 같이 집을 벗어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가 충분하다 느꼈다. 남동생이 찾은 칼국수집은 집 뒤에 있는 칼국수집보다 맛없었고, 찾고 찾은 오션뷰의 카페는 한때 건축학도였던 아빠에겐 너무나 공명이 잦은 공간이라는 나쁜 코멘트도 얻었지만 아무렴 어때. 그저 떠나 다른 공간에 나름 시간을 보내려고 있는 우리의 상태가 좋았다. 모터소리로 시끄러운 유람선 속에서 아빠는 역시나 특유의 낙천적인 태도로 큰 소리를 노래를 불렀고('바람의 노래'를 불렀다.) 옆에서 검은 봉지에 얼굴을 박고 있는 엄마의 괴로운 상태가 대조적이었다. 마치 아빠가 음절 하나하나에 매를 버는 느낌이라 웃음이 나왔다. 남동생은 그런 아빠가 부끄러워 다른 일행인 양 모른 척을 했고, 나는 그런 아빠와 엄마를 영상에 담았다. 나도 옛날 같았으면 동생과 같이 부끄러워 창문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숙였겠지만, 혹여나 민원이 들어오더라고 아빠는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 신나서 그랬다고 죄송합니다. 하며 웃을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저 이 상황을 즐겼다.
엄마가 너무 고생한 당일치기 훈련이 되어버려 앞으로 배는 같이 안탈 것 같지만, 가벼운 가족끼리의 만남은 자주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설령 그것이 알맹이 없는 그저 먹부림 파티가 될지라도.
그리고 난 광주에 갔다. 광주에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몇몇 있기 때문이다. G의 자취방은 여전히 좋았다. 17살 기숙사에서 G의 방에 놀러 가 옆에서 종종 잤어서 불편하지 않았다. K가 아직 오지 않아서 G와 H, 그리고 나 셋이서 저녁을 시켜 먹고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건 H의 결혼이 올해에 있어서 유부녀가 되기 전에 만나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H는 우리의 표현으론 거의 "퇴마 된" 수준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여전히. 가끔 과거의 모습이 묻어 나왔지만, 그건 H가 그냥 잊고 넘어가려고 하는 모습 같아서 굳이 건들지 않았다. 결혼을 위해서일까, 아님 그저 새로운 사람이고 싶어서? 아님 이게 진짜 이 친구의 모습인가? 나는 이런 종류의 궁금증이 들었지만,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나보다 다른 친구들은 H의 바뀐 모습을 여전히 낯설어했다. H가 자리만 비우면, H는 이젠 완전 다른 사람 같다는 말만 나왔다.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들을 성인 때 만날 때 담긴 욕망의 거의 9할은 과거의 재현 그리고 그 보존된 과거의 확인일 것이다.
얼마 안 있어서 K가 왔다. K는 모두가 문과인 외고에서 혼자 엉뚱하게도 오롯이 생명과학을 꿈꿨던 친구로 이학도의 길을 여전히 걷고 있는 친구였다. 학창 시절 3년 내내 내 옆자리였고, (3년 동안 반과 번호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좋아 죽어서 옆에 있진 않았지만, 우린 서로 지나치게 솔직해서 좋아했고, 도가 넘게 솔직해서 싫어했다. 그래도 난 K가 재밌었다. 자주 만나면 서로 해로울 수 있지만, 1년에 한 번은 봐줄 만한, 아니 오히려 훌륭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미친 새끼라 생각했다. 그래서 K가 오자마자 이제 더 재밌어질 거라라는 걸 알리는 폭죽이 터진 거 같았다.
(이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