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이란 무엇인가
말도 안 되게 낮은 징계 결과가 나온 뒤 이 조직에서 업무를 계속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직과 가해자는 마치 한 팀처럼 움직인 듯했다.
감사실과의 마지막 면담 자리에서 담당자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며 위로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웃으며 건넸다. 1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직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들 참고 일하는데 당신들은 왜 못 참고 이렇게 분란을 일으키냐' 담당자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의 태도 뒤에 가해자는 그동안 잘 숨어있었다.
결국 퇴사를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이 일을 옆에서 지켜봤던 국장은 우리의 퇴사 소식을 듣고 나서야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그동안 밥 한 번 같이 먹어 달라는 우리의 제안을 가볍게 넘겼었다.
식사 자리에서 국장은 여러분들이 퇴사한다고 하니 팀장이 서운해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직까지도, 퇴사를 이야기하는 지금까지도 이 분은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퇴사는 정말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당연한 걸 이렇게 애써서 증명해내야 하는 조직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의 성실함을, 노력을, 애정을 이 곳에 더 이상 쏟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당한 건 진짜 갑질이 맞는가.
나만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퇴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또 한 번 자기 검열의 늪에서 허우적 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지, 내가 좀 더 참았어야 하는지, 퇴사가 진정 해결 방법인지, 가해자의 폭언들과 보냈던 지난 시간보다 더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당한 건 분명 갑질,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 나는 내 결정의 객관적인 근거를 보고 싶었고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외국의 어느 연구 기관에서 만든 지표를 발견했고 내 생각을 깔끔히 정리했다. 나는 분명 전형적인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였다.
우리는 지표의 거의 모든 사항에 해당되었다. 뭔가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예민한 것도 내가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정확하게 딱 들어맞는 피해자의 전형이었다.
1, 7, 10, 14, 17, 18번은 임기제 공무원 세 명에게 공통적으로 가해진 괴롭힘 유형이었다. 특히 2, 4, 8, 16 은 주로 나에게 집중되었던 괴롭힘 유형이었고 5, 6, 12, 13, 19, 21, 22는 나에게는 적당히 가해졌지만 나와 같이 일한 다른 임기제 공무원에게는 강도 높게 가해진 괴롭힘이었다.
가해자는 마치 이 지표를 미리 알고, 표시해가면서 괴롭혔던 것처럼 세 명에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유형을 달리하면서 괴롭힌 것이었다. 각자의 성향을 파악해서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찾아 괴롭혔고 이 방법이 안 통하면 다른 방법을 동원해 괴롭혔다. 마치 가해자는 괴롭힘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한 것처럼 정말 부지런히 우리를 괴롭혔다.
신고의 결과는 형편없었지만 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고 나는 분명 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거면 됐다. 그리고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용기도 얻었다. 당연한 사실이라도 최선을 다해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괴로움에 조금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생겼다.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이 조금 더 넓어졌다. 갑질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