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슬로건 공모전을 열었다. 15분 정도 고민한 끝에 그럴싸한 슬로건을 응모했고, 발표일 아침부터 사이트를 새로고침 했다. 대상은 무려 아이5닉 이라는 전기차를 받는데, 당연히 내가 될 줄 알았다. 과거에 다른 슬로건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도 있고, 이번 응모작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발동한 탓이다.
발표가 나자 몇 차례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은 참가상에서조차 보이지 않는데 혹시 담당자가 잘못 올린 게 아닐까, 급하게 다시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웃기지도 않게 그런 헛짓을 하고 나서 참가자 수가 눈에 들어왔다. 무려 4천여 명. 그중에 1등, 단 한 명이 되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왜 그리 당연히 될 거라 생각했는지.
으레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는 습관이 있다. 낙천적, 긍정적이라고 둘러대면 그럴싸 하지만 나태에 가깝다. 열심히 하기는 귀찮은데 해야 하는 것들,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할 때 특히 그렇다. '나는 했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도 있고, 오랜 시간 고민을 하지도 않으며, 운이 좋을 땐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게 만연해지면 문제가 된다.
최근 벌인 사업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며칠 전, 회사와 별개로 쇼핑몰 사업을 시작한 지 3개월이 되었다. 매달 2배 이상의 매출을 올리면서 몇 개월 뒤 퇴사를 그리게 되었다. 자유 때문만은 아니다. 퇴사를 해야만 더 높은 매출을 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투잡인 지금은 매일 새벽 세시반에 일어나지만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네 시간뿐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주 흥해 보인다. 하지만 8월 초부터 적당한 결실을 얻으니 일도 적당히 하게 된다.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했는데도 '이 정도면 됐어, 그래도 주문이 잘 들어오는 걸' 이런 마음으로 친구들과 종일 게임을 했다. 운이 좋게도 주문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점점 매출 성장이 더뎌지고 있다. 노력을 절반도 아니고, 거의 5분의 1로 줄였으면서 더 성장할 것이라는 당연함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의아하다.
며칠 전부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부에, 사업에 더 매진하고 있다. 정말 다행히도 '내 사업은 개인적인 일'이다. 지금처럼 다시 정신을 차리면 성장세를 회복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면 그만이지만 다른 사람과 엮인 '관계'라면 결이 다르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 말이다.
이 존재들은 세상에서 가장 당연할 수 없는 관계임에도 가장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가치관과 생활방식, 외모, 성격, 말투 모든 게 나와 다른 사람인데 오랜 시간 관계를 이어오는 게 어디 쉬울까. 수많은 마찰을 피하거나 해소하면서 지금껏 이어져온 것이다. 심지어 나 혼자만 노력을 한 게 아니라, 서로가 노력을 했기에 유지된 관계이다. 이토록 사람답고 아름다울 수가.
헤어진 연인이 떠오른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사랑이라는 관계뿐만 아니라 그대의 존재조차 당연히 여겼는지 뒤늦게 생각해본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 만날 직장 사람들과 퇴근길에 전화할 친구들, DM으로 응원을 주고받는 지인들과 쇼핑몰의 고객들. 오늘 하루 인연이 닿을 여러 관계들도 떠오른다.
비로소 확실해진다. 관계가 당연한 것도 아니고,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다. 꼰대는 꼰대이고, 진상은 진상이다. 나와 맞는 사람들과 오래가는 게 당연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불확실한 관계를 속에서 인연의 끈을 지켜온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감사하다. 지금 내게 있는 것. 그것들이 당연함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