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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Jul 27. 2020

돈을 빌려보면 알게 될 것들.

당시 나이 스물일곱. 평소 연락하지 않던 지인들까지 연락해 돈을 빌렸다. 당시엔 1천만 원을 빌리는 일 말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면 집을 나섰다. 휑한 길에서 휴대폰을 부여잡고 카톡을 돌리고 전화를 하고 기다렸다. 제발 1천만 원이 모이길. 


지금 생각하면 '1천만 원'이라는 돈이 엄청 커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작은 돈도 아니지만 사흘 가량을 그렇게 고생하고도 '압류'라는 단어를 들을만한 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주일 이내로 마련하지 않으면 압류가 들어오는 상황. 부모님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지인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나름 스무 살부터 대기업을 다녔다. 무려 4년이나. 그리고선 창업을 한답시고 그 좋은 회사를 뛰쳐나와 3년을 고생했다. 2014년에 YOLO라는 단어를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마치 내 주위에선 YOLO의 선두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놀면서 좋아하는 작업을 하고, 용돈 정도만 알바로 충당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늦은 밤, 어머니가 내 이름을 외치면서 쓰러지셨다. 20년 내내 앓고 있던 '신부전증' 때문이 아니라 '목에 사레가 들려' 내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지셨다. 119 구급대원은 다행히 서둘러 오셨고 어머니를 그대로 앰뷸런스에 태우고 사라졌다.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중환자실 귀퉁이, 격리된 룸에 들어서면 '삑- 삑- 삑-' 하는 소리만 들렸다. 엄마는 하얀 이불을 덮고선 매일 나를 기다리셨는데 결코 말하는 법이 없었다. 눈을 뜨는 법도 없었다. 몇 주가 지나자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어머니가 되셨다. 3개월이 지나고 인사를 고했다. 



병원을 다니면서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3년 동안의 YOLO 생활은 어느 곳도 감당해주지 않았다. 머지않아 찾아온 1천만 원은 자신을 감당해보라는 양 하루 24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YOLO 생활을 하면서 인맥을 꽤나 다양하게, 많이 형성해둔 터라 용기를 내서 연락을 돌렸다. 예전에 어느 강의에서 들었는데 '융자'는 영어로 credit이라고 한다. 돈을 많이 빌릴 수 있는 건 곧 신용, 신뢰가 좋다는 얘기란다. 나는 좋은 관계가 많으니 10명한테만 연락하면 잘 해결될 줄 알았다.


사장인 형님, 인플루언서 형님, 괜찮게 사는 동창, 전 직장 동료, 사업수완 좋은 동생. 잘 될 줄 알았지만 고작 100만 원을 빌리는 데서 그쳤다. 다급해졌다. 카톡 대화목록을 훑어내리고, 연락처를 뒤지고, 페이스북 친구들을 찾아봤다. 양심적으로 오랜만에 연락해서 '돈 얘기'를 꺼내기가 창피했다. 




50명은 족히 넘게 연락을 돌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했고, 하루가 지나서 다시 한번 지인들에게 사과문을 돌렸다. 잘 해결됐고, 불쑥 연락해 미안하다고, 연락받아줘서 고맙다고, 창피하다고, 건강하라고. 그 사과문을 쓰면서 내 인생의 YOLO는 막을 내렸다.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쉬는 날 없이 하루에 17시간을 일했다. 알바를 세 개 돌렸는데 야간 1.5배를 챙겨주는 곳도 있어서 세 달 만에 갚을 수 있었다. 동시에 좋은 기업들의 문을 두드렸고 야간-아침 퇴근 후 지방까지 면접을 보러 다녔다. 덕분에 지금은 먹고사는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 




돈을 빌려보니 알게 된 것들이 있다. 


1. 내가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많이 맺고 있었다 한들, 그들에게 내 치부를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손을 벌리는 순간 내 치부가 처음 드러났고 나도, 그들도 용기를 내야 했다. 


2. 우리는 감정보다 돈에 인색하다. 만약 내 문제가 감정이었다면 얘기가 달랐을 테다. 누구든 위로의 말을 찾아 건넸을 테고, 같이 울어주거나 술 한 잔을 함께 했을지도 모른다. 


3. 인생이 무난하게 잘 풀려간다고 생각되면 한 번쯤 주변을 둘러보자. 누군가 슬며시 다가와 손을 내민다면, 손을 잡자는 뜻이 아니라 '내 손 좀 잡아줘. 제발'이라는 뜻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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