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을 마치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낮부터 와 있던 카톡에 드디어 답장을 한다. "대표님. 조문을 와서 답장이 늦었네요. 지금 전화드릴까요?" 동종업 대표님이 세금 관련 정보를 공유하겠다고 연락을 주셨다. 1월 부가세 신고 때 세금 공부를 톡톡히 하신 덕분일지 모르겠다. 나는 별달리 할 말이 없어 요즘 근황을 전했다. "파스타집에서도 일하고, 쇼핑몰도 여전히 해요. 이번에 파워블로거를 알바로 채용했는데 키워드를 엄청 잘 잡으세요! " 아뿔싸. 또 이상한 자랑을 했다. 근황이 아니었다. 자존심을 치켜세우기 위한 나의 이득이나 잘난 점을 드러낸 것이다.
조금 전 장례식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나를 온전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느낌. 어느 누굴 만나도 나를 포장하느라 스스로 벽을 세우는 느낌. 어쩌면 냉정과 가식 사이. 요란한 변덕은 도전으로 둔갑시키고, 쿨하지 못한 속내는 옷 하나라도 더 걸쳐 가리려는 속내. 그러는 동안 나를 진심으로 대해준 모든 이들에게 나는 진심으로 다가서지 못한 게 아니었을지, 오만 생각이 들었다. 끝내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좀처럼 마시지 않던 술이라 그런지 유난히 쓰게 넘어갔다. 그럼에도 이 한 잔은 꼭 마시겠노라고, 반성은 원래 달지 않은 것이라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7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모두 정리하고, 그동안 개두지 않던 양말을 차곡히 정리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쓰레기통을 비우고, 설거지를 하고, 방치했던 택배 상자도 뜯어 버렸다. 남자치고는 깨끗하게 생활한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TV 아래 소복이 쌓인 먼지와 몇 주전 먹다 남은 약봉지가 구석에서 나무란다. 나의 모든 가면은 어쩌면 불편한 현실을 감추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방을 정리하지 않았으니 바쁜 투잡러로 포장하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니 더 바쁘다고 포장하고.
항상 그래왔다. 바쁜 모습을 드러내면 모든 게 용서되는 분위기였다. 실은 감당하지 못할 일들을 벌여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설령 내가 벌인 일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감내해야 할 무게를 어떻게든 벗어던져버리는 습관이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대목이 나온다. [회사에서 보스에게 가장 훌륭한 직원으로 보이는 방법.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는 척하며 수시로 복도를 돌아다니면 된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그 연출만으로도 많은 일을 잘 처리하는 직원으로 보인다.] 맞는 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고, 요란하면 다들 건들지 않는다.
소주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했다. 캠핑 스테인리스 컵에 따랐는데 어쩌면 한 잔이 아니라 서너 잔 양일지도 모르겠다. 반쯤 남았는데 버릴까, 마저 마실까를 고민하다가 컵을 내려놓았다. 나는 술로 극복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터프하게 극복하는 타입이 아니기에, 그저 글로 풀어 해소하는 간지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남은 소주 반 잔을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했다. 불편한 현실을 감추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솔직하게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 스스로 세운 벽을 부수고 현재에 더 충실할 것. 존경하는 작가의 말로 작은 반성문을 마무리한다.
"이야기는 현실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싣고 현실을 찾아 나서는 추진체이며 실존의 무정부적인 상태로부터 질서를 찾아내려는 우리들의 가장 진지한 노력이다." - 로버트 맥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