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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ukgalbi May 04. 2021

그냥 부장일 뿐인데?

호칭. 그것이 주는 무게.

"오 공기가 바뀌었어"


하반기. 추석이 지날때 즈음이여면. 긴 추석연휴 뒤에 찾아오는 명절증후군 따위보다 더 무겁고, 마음을 짓누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인사위원회"


우리는 매년 12월 중순경이 되면 인사위원회를 진행한다. 경영진들 앞에서 그해의 인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을 Review하고 내년도 인사정책의 골격을 잡는다. 대충 살펴보자면.


  1. 초임수준 : 차년도의 초임수준을 설정한다. 이때는 경쟁사나 인사교류회를 진행하고 있는 타사의 수준, 인근 동종업계의 수준을 고려해서 초임을 결정한다.


  2. 차년도 임금인상률 : 전 직원의 관심사이다. 우리는 통상 세 가지 안을 준비한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안,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높은 안,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낮은 안. 그러면 거의 우리가 진짜 원하는 안이 채택되는 구조이다. 그러나 물론 아닌경우도 매우 많다.


  3. 금년도 성과금 : PS 수준을 결정한다. 예전에는 초과이익분배금이라고 해서 경영진이 개입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적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초과이익분배금을 FM대로 운영하게 되면 평균임금에 포함되어 퇴직금에 산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경영진이 정하는 것으로 책정방식이 변경되었다.


  4. 평가결과 확정 : 개인평가 결과가 확정되고, 이에 따른 핵심인재가 확정된다. 핵심인재로 선발되면 상당한 임금인상과 성과급이 지급되기 때문에 이 역시 직원들의 관심사.


  5. 승진 : 제조직(생산직)직원들의 승진여부가 이때 확정된다. 승진누락자들의 경우, CPO가 설명하고 이를 확정한다. 일반 사무직, 연구직의 경우 수평화제도가 적용되기에 승진은 없다. 다만, 직급이 아닌 호칭은 일부 부서에 존재한다.


  6. 차년도 인사 주요 쟁점/추진사항 : 법적인 ISSUE들을 확인하고, 차년도 인사팀의 주요 추진사항에 대해 경영진 보고를 진행한다.


대충 이렇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이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는게 만만치가 않다. 실제 보고도 3시간이 넘게 이뤄진다. 그렇기에 인사팀의 분위기는 인사위원회에 가장 뼈대가 되는 평가가 진행되는 하반기, 그러니까 추석이후부터 달라진다. 공기가 바뀐다. 아주 무겁게, 그리고 매우 매섭다.


2020년의 인사위원회도 늘 그렇듯 무거웠다. 평가결과가 나오고, 핵심인재를 분류하고, 승진자들을 체크하고 있을 때였다.


장문의 컴플레인 메일이 도착했다.


인사위원회 안건에 승진(호칭변경자가 맞는 표현인데, 편의상 승진이라고 표기하겠음.)자들을 올리기전에 해당 조직장들에게 승진자에 대한 확인을 받는 과정이 있는데, 한 사람이 누락됐던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차장에서 부장으로 호칭이 변경되는 경우는 따로 근속연한이 없기에 승진자 확인이 필요없었는데, 어떤 조직장이 A차장은 왜 부장승진 검토명단에 없냐는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평화제도이기에 승진이 없다. 다시 말하면 승진급도 없고, 변하는건 호칭 하나 뿐이었다. 그냥 주변 사람들이 불러주는 호칭이. A차장님에서 A부장님으로 변경되는 것 뿐인데 그렇게 장문의 메일로 컴플레인을 해야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A차장을 검토명단에 올리고 그 일은 넘어갔다. 그러던 2021년.


나도 사원에서 Manager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다만, 사원에서 Manager로의 호칭변경은 보상제도가 많이 달라지기에(승진급은 없지만, 보상테이블이 달라진다) 단순 호칭변경과는 좀 다른 의미를 갖지만, 조직내에서 보기에는 그냥 호칭만 변경된거니까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거 같다.


단순히 호칭만 변경된건데, 그러니까 부르는 명칭만 변경된거였는데 그게 사원이라는 딱지보다는 Manager라는 딱지가 사람을 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딱지가 책임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자심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아무튼 사원일 때와는 분명 무언가가 달랐다. 그리고 컴플레인을 강하게 걸던 A차장의 조직장을 생각했다.(그리고 좀 죄송했다.)


많은 회사들에서 수평화제도를 도입하면서 직급을 파괴하고 "A 프로", "A PL", "A 님" 등 간단하고, 수평적인 호칭을 인사제도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게 뭔가 싶었다. 프로님이라니. PL님이라니. 인사팀도 할짓없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느껴보니, 호칭에서 오는 무게감은, 혹은 그것을 벗어났을 때의 가벼움은 상당했다.

마하말리뿌람인가.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했던 거 같다. 엄청난 경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인도에서의 5개월간 몇 안되는 시외로의 외출이었다.

그저 부르는 명칭을 바꾸었을 뿐인데, 효과는 상당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이야기.


사람의 말은 생각으로 이끌고, 사람의 생각은 행동으로 이끈다.


그렇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의 말을 바꾸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칭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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