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들야들하고 보들보들한 연두색 이파리들을 보고 있으면 천진난만한 아기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너무 좋다. 5월 하순이 되니 게으름 피우며 늑장 부리던 고집쟁이 나무들도 싹을 틔우고 예쁜 이파리를 내놓는다. 어찌 그리도 예쁜지 꽃은 피었다 하면 며칠 뒤에 시들고 지는데 나뭇잎은 몇 달 동안 푸르름을 자랑한다. 꽃과 나무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생각하기도 싫다. 불과 며칠 사이에 세상이 온통 초록 물이 들었다.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와서 가지 않을 것 같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오지 않는 봄 때문에 애를 태웠는데 이러다가 훌쩍 떠날 것 같아 어딘가라도 봄을 붙들어 매 놓고 싶다. 바람이 불고 추운 봄이라도 봄이 할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다행이다.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나무에 꽃들이 만개한 게 보인다. 꽃사과나무의 꽃들이 하얀색과 분홍색으로 피어나 동네를 환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리도 고운 색으로 자신을 드러내는지 모르겠다. 일 년을 기다리며 준비한 시간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조금만 아파도 엄살을 부리며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루며 사는 나보다 훨씬 낫다. 나무들이 푸르게 자라듯 볼 때마다 한 뼘씩 잘 자라는 손주들과 걷는 길은 신이 난다. 아이들의 좋은 기를 받아서 인지 오래 걸어도 지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다. 넘어질 듯 말 듯 아장아장 걷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훌쩍 커서 걸어가는 모습이 의젓하고 믿음직하다.
그렇게 세월 따라 살아간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롭다. 봄이 온 산천은 겨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언제나 봄인 것처럼 세상을 덮고 있다. 겨울은 상상이 안된다. 그토록 많이 쌓여있던 눈이 사라지고 봄은 작년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사람은 한번 가면 볼 수 없는데 나무들은 수십 번, 수백 번의 옷을 갈아입고 서 있는다. 걸어가다 만나는 나무들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되었다. 넘어진 나무들과 구멍 뚫린 나무들이 있으면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다. 잘 자라는 나무는 만져주고 멋지다고 이야기해주면 기분 좋아한다.
이제는 작년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은 보이지 않고 풀들이 땅을 덮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풀들이 자란다. 이유가 있어 저렇게 세상에 나왔을 거라 생각하니 모든 풀들이 소중하게 보인다. 지난번 산책길에 있는 다리 보수 공사를 한 뒤에 주위에 나무를 심었는데 어느새 부쩍 자라 푸르른 숲이 되어간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자연은 정말 거짓말을 안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완벽한 날씨에 숲길을 걸으며 이런 게 행복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걸으며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나무와 풀과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이제는 남은 인생 동안 잘 먹고 잘 놀고 잘자면 된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삶을 열심히 살고 손주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니 우리 둘만 잘 살면 된다.
(사진:이종숙)
소리 없이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본다. 오리 한쌍이 한가롭게 논다. 암놈은 나무 위에 앉아서 선탠을 하고 수놈은 시원한 물 위를 오르내리며 노는 한가로운 한낮이다. 아무도 건들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깊은 숲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오리를 보니 참으로 평화롭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바쁘고 힘들어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숲 속의 오리는 저토록 평화를 누린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평생 살아가는 모습이 험난한 것을 생각하면 저런 짐승으로 태어나 살다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타고난 명이 있어 한번 태어나면 시간을 채워야 간다는데 짐승들은 어떨까? 그들에게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찮은 개미나 벌 같은 곤충들은 밝히거나 잡히면 죽는다.
숲에 넘어진 나무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간다. 계절 속에 살다가는 자연처럼 우리네 인생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는 것이다. 봄이라고 다 똑같은 봄이 아니듯이 사람 또한 매일이 같지 않다. 늙지 않을 것 같았는데 손자들이 큰 모습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다. 푸르른 이파리를 손으로 만져본다. 기름이 반지르르 흐른다. 어린 손주들의 살결 같다. 누구나 저 이파리 같은 때가 있었으리라.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는 것은 자연의 순환이기에 누구도 막지 못한다. 때가 되면 오고 가는 계절 안에 늙는 것을 거부할 수 없고 순응하며 받아들이고 산다. 어제의 나는 없고 내일의 나도 없는 지금 안에 내가 있다. 지금의 나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이고 어제의 나의 생각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어디부터 흘러온 물인지 어디로 흘러가는 물인지 지금 내 옆으로 흐르며 나를 만나고 가는 저 물처럼 지금 내 주위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다. 부족한 듯, 모자란 듯 살아온 세월이 만들어 놓은 지금의 나를 사랑하며 산다. 욕심과 바꾼 평화 속에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