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마무리하는 텃밭을 내려다본다. 싱싱하던 야채들은 벌써 가을이 온 것을 알고 떠날 준비를 한다. 여기저기 열무가 제멋대로 자라고 어떤 것은 씨가 생긴다. 뜨거워보지도 못한 여름이 이렇게 지나가는데 열무김치를 만들어야겠다. 지난번에 다 뽑아서 담근 줄 알았는데 늦게 나온 것이 제법 자랐다. 일찍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늦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야채도 늦게 나온 것도 많다. 더 자라게 놔두면 꽃이 피고 질겨서 맛이 없다. 어린것들은 다듬기가 성가시지만 지금 담지 않으면 때를 놓친다. 남편이 뽑아 놓은 열무를 하나하나 다듬는다. 벌레 먹은 게 몇 개 나오는 것 외에는 대체로 깨끗하여 남편이 씻어주고 나는 찹쌀풀을 쑨다. 아무래도 열무김치는 찹쌀풀로 만들어야 시원하고 맛있다.
열무김치는 밥을 비벼먹어도 좋고 더운 날에 국수를 삶아서 비벼먹거나 말아먹으면 더위도 식히고 시원해서 좋다. 옛날에 친정엄마가 즐겨 만들어 주시던 음식이다.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2년 뒤에 이민을 온 나는 결혼 전에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을 제일 좋아한다. 친정엄마는 식구가 많아서 음식을 만들면 많이 만들어야 한다. 커다란 그릇에 막김치를 담가서 중간 크기의 항아리에 담아 놓아도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서 며칠 지나면 또 김치를 담그셨다. 김치가 익어 가면 찌개도 끓이고 부침개도 해 먹기 때문에 김치가 쉽게 없어진다. 엊그제 담은 것 같은데 엄마는 김치 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신다.
엄마가 김치 거리를 사러 가시는 날은 특별한 선물을 사 오는 날이기도 하다. 맛있는 간식거리로 우리를 위해 찹쌀 도넛과 아버지를 위한 각종 떡을 사 오신다. 어쩌다 재수가 좋은 날은 엄마가 우리들에게 강아지도 사다 주신다.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들이 종종 손주들 용돈을 주려고 집에서 키우는 개가 강아지를 낳으면 상자에 넣어 가지고 시장에 나와서 판다. 엄마는 워낙 개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초라해 보이는 할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강아지를 사 오셨고, 초봄에는 노란 병아리도 사다 주셨는데 며칠 못 가서 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올망졸망한 6남매가 좋아하니까 엄마는 시장에서 좋은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사 오셨다. 김치 거리를 사러 가셔서 배추는 안 사 오고 강아지와 함께 걸어오는 엄마를 길거리에서 만난 적도 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다른 사람이 사갈까 봐 먼저 샀다는 말을 듣고 깔깔 웃었던 기억도 난다. 엄마는 한번 김치를 담그면 여러 가지김치를 한꺼번에 담근다. 배추김치, 깍두기 그리고 무생채와 나박김치까지 담으시고 여름에는 열무김치와 총각김치를 담그신다. 식구가 많고 아이들 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누구라도 오면 찌개만 있으면 된다고 김치를 열심히 담그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내가 그때 당시 엄마의 나이보다 훨씬 많지만 나는 엄마가 하던 대로 이런저런 김치를 담근다. 부추가 있으면 부추김치를 담그고, 열무가 있으면 열무김치를 담근다. 오이가 있으면 오이소박이를 담그고 무가 있으면 깍두기를 담근다. 배추가 좋아 보이면 배추김치를 담고 깻잎이 많으면 깻잎김치도 담근다. 무엇이든지 재료가 생기면 김치를 담가 놓으면 맛있게 먹고 찌개도 끓여먹는다. 그러다 보면 냉장고에는 생김치가 있고, 맛있게 익은 김치가 있고, 그중에 신김치도 생긴다. 금방 담근 생 김치는 초 한 방울 넣으면 맛이 살아난다. 잘 익은 김치는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하나씩 얹어 먹으면 꿀맛이다. 신김치는 돼지고기와 두부를 넣고 찌개를 끓여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최고다.
어쩌다 보니 김치 예찬론자가 되었다.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서 없는 게 없어도 김치가 없으면 무언가 서운하고, 반찬이 별로 없어도 맛있는 김치가 있으면 한 끼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민 초창기에는 배추가 아주 귀해서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서 먹곤 했는데 양배추 김치도 아삭아삭 하는 게 맛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배추가 흔해지며 겨울에 김장을 담근 적이 있다. 조그만 플라스틱 통에 김장 김치 한통씩 담아서 아파트 베란다에 여러 통을 놓았는데 밤새도록 눈이 엄청 내려서 김치통을 덮었다. 눈이 내린 베란다가 자동으로 냉장고가 되어 김치를 한통씩 꺼내먹는데 어찌나 맛있게 담가졌는지 그 김치 맛이 지금껏 생각이 난다.
다행히 올여름은 날씨가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아 텃밭에서 자란 열무가 제법 많아 두 번씩이나 김치를 담글 수 있어 좋다. 찹쌀 풀을 쑤어 놓고 열무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 준비를 하다 보니 생각은 추억 속으로 간다. 친정엄마가 이곳에 오셨을 때만 해도 무엇이든지 후다닥 잘하는 나를 보시고 대충 하는데 이렇게 김치가 맛있다던 친정엄마가 그립다. 열무를 한번 더 씻어 건져 놓는다. 양념을 준비해서 풀국에 넣어 섞고 간을 한 다음에 김치통에 열무와 양념을 번갈아 올려놓고 꼭 눌러놓으면 된다.
그럴싸한 열무김치가 되었다. 하루 저녁 실온에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으면 며칠 동안 자연히 익는다. 그냥 놔두면 시들어버릴 열무를 다듬어서 김치를 만들고 나니 부자가 된 것 같이 기분이 너무 좋다. 귀찮다고 안 했으면 후회할 뻔했다. 무엇이든지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미루다가 버려진다.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긴 이곳에 싱싱한 야채는 참으로 귀하다. 무엇이든지 여름에 나오는 채소들을 겨울을 위해 얼려놓아야 한다. 눈이 많이 와서 장 보러 가기 힘들 때, 얼려놓은 야채를 꺼내 먹으면 보너스 같아 좋다. 파, 부추, 호박, 근대 하다못해 쑥갓이나 상추도 얼렸다가 된장국을 끓여먹으면 맛있다. 어느새 나도 일거리가 눈에 보이고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운 게 있는 것 보니 철이 들었나 보다. 부지런한 손길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친정엄마가 그립다. 열무김치가 익어가고 아름다운 추억도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