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세상을 덮고 있다. 아직은 해뜨기 전이라 그러려니 한다. 오늘부터 온도가 떨어진다고 하니 미리부터 걱정이다. 하는 일 없어도 날이 추우면 괜히 움츠러든다. 날이 추워도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니면 되는데 왜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월은 가고 해 놓은 것 없이 시간만 보낸 것 같아도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
어제는 핼러윈데이였다. 평소 같으면 동네 꼬마들을 위해 초콜릿을 사다 놓고 나누어 줄텐데 올해는 집에 불을 꺼놓고 가만히 있었다. 며칠 전 고국에서 있었던 대형 참사 사고로 마음이 무겁다. 몇 날 며칠을 계획하며 재미있게 친구들과 놀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을 마쳤던 참사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현실에 넋을 놓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디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아파도 어쩔 줄 모르는데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다니 통탄할 일이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고로 죽어간다. 인도에서 다리가 붕괴되어 사망자가 많다는 뉴스를 본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이 이어진다. 사고 없는 날이 없다.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다치고 죽는다. 하늘도 슬픈지 구름으로 꽉 차 있다. 눈이 살짝 내려 지붕과 피크닉 테이블이 하얗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내년 4월까지는 눈이 쌓여 있을 것이다.
11월 1일이다. 10월을 보내고 새로운 달을 맞는다. 새벽부터 참새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할 말이 많은가 보다. 오늘 하루도 사고 없이 잘 보내자고 하는 것 같다. 나무들은 이제 옷을 벗고 맨몸으로 죽은 듯이 서 있다. 다시는 살아나지 않을 듯 바싹 말라 겨울을 맞는다. 이제 올 한 해 할 일을 다 한 듯 서있는 모습이 늠름하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어찌 보면 황량해 보여도 여유롭고 멋지다.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어 보여 좋다.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잃을 게 없다. 추운 겨울이라도 땅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희망 속에 살아간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내려놓고 도에 정진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참고,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주고 재회를 약속한다.
여름철 풍성하던 텃밭은 휴식을 취한다. 여름내 무거운 잎들을 힘들게 지고 있던 나무들은 이파리를 떨구고 가벼워진 몸으로 기지개를 켠다. 열매는 새빨갛게 익어가고 오는 세월을 받아들인다. 구름이 해를 가려도 해가 있음을 믿고, 비나 눈이 와도 언젠가는 그칠 것을 알기에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릇을 비우면 더 많이 담을 수 있듯이 마음 또한 비울수록 세상을 더 이해할 수 있다. 나무처럼 꽃처럼 할 일을 다하고 떨어지면 된다.
지난여름, 딸이 작은 앵두나무 한그루를 사 와서 뒤뜰에 심었는데 어린 나무도 가을이 오는 줄 알고 단풍이 들더니 하나둘 이파리가 떨어진다. 어디서 날아와 뿌리를 내리던 잡초 하나가 여름 내내 꽃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잡초인가 하고 뽑아 버리려다 혹시 몰라 놔두었더니 꽃망울을 달기 시작하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몸보다 더 많은 노란 국화꽃을 피워 대며 정원을 환하게 하였다. 오고 가며 '예쁘다, 정말 예쁘다' 하며 사진을 찍고 칭찬을 했더니 한 달이 넘도록 장미나무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젯밤에 영하로 내려간 차가운 온도 때문에 얼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며칠 전에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데 라일락 나무는 시퍼런 이파리를 다 떨구고 오들오들 떨고 서 있는데, 옆에 있는 사과나무는 잎을 그대로 매달고 겨울을 맞는다. 지금 떨어지지 못한 나뭇잎은 얼어서 겨우내 나무를 지키다가 봄에 날이 녹으면 새 이파리에게 자리를 내주고 떨어진다. 지나간 계절은 추억으로 남고 겨울은 희망 속에 봄을 기다리게 한다. 하루라는 시간이 더해져 세월을 만들고 오늘 받은 하루는 24시간만 머물다 간다. 밤이 오면 또 다른 하루가 오고 어제 받은 하루는 사라진다.
매일이 같은 날인 것 같아도 시간은 간다. 거부해도 오고 가고, 부정해도 오고 간다. 원망과 분노로 가득한 현실 속에 투정한다고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결코 생기지 말아야 할 일이 생기고, 없어져야 할 것들이 생겨난다.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고, 지키려 해도 빼앗기며 살아가는 현실 속에 어딘가 기댈 곳이 없지만 이겨내야 한다.
삶은 흘러가는 강물이다. 흘러가다 햇살도 만나고, 비와 눈도 만난다. 바람도 만나서 출렁이고, 바위를 만나서 울컥하고, 떠내려오는 나무들과 함께 흘러간다. 삶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잘못을 파헤치고 추궁하며 원망한다고 달라질 것 없다. 남을 탓한다고 해결될 일은 세상에 없다. 모든 일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너무 많다. 바라보는 사람도, 당사자도, 겪는 사람도, 모두 아프고 괴롭다. 누구를 원망한다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당연히 없어야 할 일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오고 간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그리고 고통과 희열은 떨어질 수 없는 가장 친한 친구이다. 힘든 일 뒤에 신나는 일이 오고,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덩달아 온다.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울면 된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나무도 다치면 아프고 꽃도 꺾이면 슬프다. 얼어서 고개 숙인 노란 국화가 안쓰럽지만 생명은 어떻게든 어어진다. 길고 짧게, 가늘고 길게 살다가는 자연을보며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