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들판을 걷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숲으로 연결된 작은 길이 보인다. 사람들이 걸어간 발자국이 보이고 바쁘게 나무를 오르내리는 다람쥐가 보인다. 계곡은 눈이 쌓여있고 새들은 햇살 좋은 곳에 사람들이 놓아둔 새 밥을 먹으러 바쁘게 오간다. 평화로운 아침에 숲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 있다. 겨울은 메마르고 쓸쓸하다 생각했는데 세월이 갈수록 겨울 속에 아름다움이 있음을 배운다. 메마른 낙엽들은 바람이 불 때 하나 둘 떨어지고 죽은 듯이 눈을 맞고 서있는 나무들은 겨울을 거부하지 않고 저항하며 맞서지 않으며 순종한다. 내리는 눈을 피하지도 않고 눈이 싫다고 짜증 내지 않고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고 오는 것을 맞는다.
발자국 소리로 잠자는 숲을 깨울까 봐 살살 걸어간다.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이 넓은 숲에는 남편과 나만 걷는다. 새와 다람쥐는 겨울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커다란 백양나무 하나가 계곡을 쳐다보고 비스듬히 눈을 맞고 서 있다. 색이 고와서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본다. 연분홍빛 가지에 하얀 눈이 쌓여있다. 사시사철 다른 모습으로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정이 들어 지나갈 때마다 눈길을 준다. 지난가을 그 옆에서 있던 해바라기는 허리를 굽히고 생을 마감한 채 눈 속에 파묻혀 있다. 세상 모든 만물은 오고 가는 때가 있어 피할 수 없다.
인간이 하고자 하는 것들도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리석은 인간은 억지로 하려고 하다가 다친다. 안되면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릴 줄 모르고 교만하여 일을 망친다. 자연에 순종하는 계절은 알아서 오고 간다. 빨리 가게 되었다고 반항하지 않고, 일찍 오게 되었다고 오만방자하지 않는다. 곁에 서있는 나무가 더 크고 멋있다고 부러워하지 않고 볼품없는 풀이라고 얕잡아보지 않고 경쟁과 시기와 질투 속에 살아가지 않는다. 서로 의지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피고 지는 계절을 따라서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며 걸어간다. 죽은 듯한 모습은 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버리지 않고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아무도 모르게 땅속으로 뿌리가 뻗어가고 어느 날 다시 태어난다. 한번 세상에 나온 만물은 없어지거나 사라진 것 같지만 영원히 존재한다. 하얗다 못해 파란 눈 위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눈을 살며시 감고 순백의 눈 냄새를 맡아본다. 어릴 적 하얀 눈을 한 움큼 입에 넣고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난다. 숲 속의 골짜기마다 쌓인 눈이 나무들을 끌어안고 있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모습이 정겹다. 상대의 흠집을 꺼내고 잡아내기 바쁜 인간들과는 다르다. 서로가 없어야 이긴다고 생각하는 인간사회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데 숲은 세월이 가도 평화롭다. 남을 죽이고 밟지 않아도 서로 공존한다는 것을 안다. 순서와 차례를 정하지 않아도 창조주의 위대한 섭리로 이어진다. 가면 오고 오면 또 가는 이치를 깨닫는 자연에게 인간은 배워야 한다. 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지고,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다가 다시 길이 나온다.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 생각될 때 내리막길이 나온다. 내려가는 길이 쉬운 것 같지만 나름대로 힘이 든다.
층계가 있어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내려가 보니 또 다른 길을 만나게 된다.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까치가 눈 위에 앉아서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다. 하얀 눈 속에 푸릇푸릇한 풀이 꺾인 채 누워있는 것이 보인다. 배가 고픈 까치가 부리를 이용해서 힘껏 잡아당겨 얼어 있는 풀이라도 먹으려고 애쓴다. 생각보다 맛이 없는지 양지쪽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 먹을 것이 보이는 곳을 향해 급하게 날아간다. 숲이 휑하다.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고 서있는 나무들이 서로를 기대고 숲을 지킨다. 나무들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얼굴을 내밀며 함께 걷자고 한다.
숲이 나를 안고 나는 숲의 품에 안겨 숲이 내쉬는 숨을 들이마신다. 숲은 내가 있어 좋고 나는 숲이 있어 좋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숲은 모든 것을 내어준다. 봄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최선을 다하는 숲을 보며 눈 위를 걸어본다. 꽃으로, 녹음으로 그리고 단풍으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다. 겨울이 봄을 안고 어디선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