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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피어나는 동네

by Chong Sook Lee



하늘이 낮게 내려앉았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 딸 말에 구름은 하늘을 덮고 비가 올까 말까 하는데 길을 나선다. 겨울 코트를 입어서 인지 춥지 않다. 오가는 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가고 젊은 남자 하나가 반바지 차림으로 차로 가서 문을 연다. 허리를 구부린 채 무언가를 찾느라 바쁘다. 학교를 지나 운동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본다. 조그마한 정원 옆으로 노란 개나리가 만개하여 구경꾼들을 기다리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치형으로 된 출입구로 들어가 본다. 여름에는 제법 낭만이 깃든 정원인데 겨울을 떨치지 못한 채 봄을 맞는다. 아직 새싹이 나지 않은 풀들이 많고 나무 사이에 놓여 있는 의자는 을씨년스럽다.


비가 한두 방울씩 나무에 떨어지는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깬다. 동네 사람들이 오래전에 지어 가꾸는 정원에 새집 모양의 도서관이 하나 서있고 안에는 여러 가지 책이 있다. 누구나 집에 가져가서 읽고 다시 가져다 꽂아놓으면 된다. 소설책도 있고 시집도 있다. 읽어볼 만한 책이 있나 해서 이것저것 빼서 훑어보았는데 그저 그렇다. 책장문을 닫고 앞으로 걸어가는데 죽은 덤불 사이에 예쁘게 자라나는 꽃들이 보인다. 수선화과에 속하는 것 같은데 보라색으로 가지런히 피어나 있다.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마른풀 사이에 새 생명이 피어난다. 참으로 신비롭다. 죽은 풀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난다.


나무 사이에 놓여있는 의자에 잠깐 앉아 본다. 지난가을에 남편과 함께 왔을 때는 온통 단풍잎으로 가득하던 곳인데 겨울을 벗고 서 있는 지금은 황량하고 쓸쓸하기조차 하다. 그래도 봄이 오고 있기에 희망이 있다. 여기저기 파릇파릇한 싹이 땅을 뚫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지만 옷이 젖을 만큼 오지 않기에 그냥 앉아있고 싶다. 바람도 없고 고요하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말할 사람도 없다. 저마다의 할 일을 하고 있는 자연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좋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좋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좋은 자연과 소통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좋다. 정원을 빠져나와 커다란 공터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공터 잔디 위에 민들레와 씀바귀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풀들이 자라고 다리옆으로는 블랙베리가 봄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해 여름이 그리 덥지 않아서 가을이 되어서도 익지 않았던 블랙베리가 올해는 풍년을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동네로 들어선다. 오래된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 앞 정원에는 울긋불긋한 꽃들이 피어 있다. 몇십 년 된 집들이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새로 지은 집들 같다. 비는 여전히 한두 방울씩 떨어지지만 기왕 동네 한 바퀴 돌아보려고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사슴들이 돌아다닌다고 경고판이 눈에 띈다. 동네 사람들의 텃밭에 들어가서 채소를 망쳐놓기 때문에 망을 쳐놓은 집들이 있다. 그들은 그저 배가 고파서 먹겠지만 망쳐진 채소를 보면 속이 상한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돌아서 가보니 쇼핑센터로 가는 길과 만난다. 평소에 가는 길과는 다르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니 은근히 반갑다. 들판을 따라 돌아서 집으로 향한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다. 방수로 된 쟈켓이라 비 맞을 염려는 없지만 동네 한 바퀴를 걷다 보니 다리가 아프다. 꽃구경도 하고 정원 의자에 앉아서 사색도 했더니 배고 고프다. 집으로 가서 손자도 보고 산모 밥도 챙겨주려면 바쁘다. 오랜만에 비를 맞고 다니는 어린아이가 되어 봄이 예쁘게 피어나는 동네의 매력에 흠뻑 빠져본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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