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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 안에... 하루가 오고 간다

by Chong Sook Lee



며칠 전에 서머타임이 시작되었다. 지난가을에 공짜로 받은 한 시간을 돌려주었다. 그만큼 낮이 길어지고 활동량이 많아진다. 긴 겨울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면 몸도 마음도 부지런해야 한다. 이른 시간인데도 밖이 훤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다. "으앙으앙" 하는 손자의 울음소리로 시작하는 하루는 손자가 자야만 끝이 나는데 딸이 시도 때도 없이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어르고 달래고 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 아기들의 언어는 울음이다.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더러워도 울고, 자세가 불편하거나 트림이 필요하면 징징대고 칭얼거린다.


작은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이 참 신기하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을힘을 다해서 울며 항의하고 만족스러울 때 잠이 든다. 아기라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편안하게 자는 모습은 살아있는 천사의 모습이다. 잠을 곤하게 자면서 웃기도 하고, 울고 찡그리며 미소를 지었다가 삐죽거리며 운다. 엄마 뱃속에서 배운 것들을 그대로 한다. 기저귀를 갈면 뭐가 그리 싫은지 소리를 지르고 울며 발버둥을 친다. 기저귀 가는 시간은 전쟁이다. 손자는 울어대고 여기저기 닦아주며 기저귀를 갈아주는 딸과 사위는 쩔쩔맨다. 한동안 씨름을 하고 안아주면 손자는 피곤한 지 눈을 스르르 감는다. 이제 자나보다 하고 침대에 뉘려고 하면 '무슨 말씀이냐'며 눈을 번쩍 뜬다.


다시 안아서 걸어 다니면 안심하고 잠이 드는 손자가 우리 집에서 왕이다. 하루가 손자로 시작되고 손자와 함께 손자 위주로 살아간다. 한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새삼 엄청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딸이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며 내가 어떻게 아이 셋을 낳고 키웠나 한다. 그때는 인터넷이나 구글도 없던 시대다. 어디에 물어볼 곳도 없어서 열이 나고 아프면 백과사전을 보며 해결했다. 아무것도 모르며 철없이 세 아이를 키운 것이다.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 내 힘으로 한 것은 없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도와준 것이 틀림없다. 43년 전, 캐나다로 이민 와서 24일 만에 큰아들을 낳고, 13개월 뒤에 둘째 아들을 낳고, 18개월 뒤에 셋째로 딸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성장하여 가족을 거느리며 사는 모든 것들이 기적이다.


마음은 여전히 그때에 머물지만 몸은 세월을 알아차린다. 생각은 아직도 뭐든지 할 것 같은데 마음대로 안된다. 마흔에 첫아기를 낳고 힘들어하는 딸과 사위를 위해 특별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은데 혹시라도 산모와 손자에게 해가 될까 하는 조바심이 앞선다. 기름진 음식이나 맵고 짠 음식을 피하다 보니 음식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 같아 맛을 보고 또 보게 된다. 무엇이든지 아이들이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네가 많아지는 세상인데 손자의 울음소리가 너무 좋아서 녹음을 해 놓는 할머니다.


'응아응아' 하며 입을 벌리면 배고프니 젖 달라는 소리고, 이유 없이 보챌 때는 기저귀를 갈아 달라는 소리다. 잠을 못 이루고 자꾸 깨서 칭얼거리면 잠자리가 불편하거나 속이 불편하여 트림을 시켜달라는 소리다. "우리 손자는 울기도 잘하고 젖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똥도 잘 싸서 너무 예뻐요". 하면 딸이 웃는다. 연년생으로 세 아이들을 기를 때는 어찌 키웠는지 기억도 없다. 몇 가지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을 뿐 울음으로 표현하는 손자를 보면 모든 것이 새롭다. 구글에 물어보고 아기를 키우는 세대들에게 나는 그저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도와주면 된다. 참견이나 조언도 필요 없고 그저 아이들 행복을 기원해 주면 된다.


옛날에는 어른들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생활했지만 지금은 인공지능의 힘으로 산다. SNS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정보를 얻으며 똑똑하고 명쾌하게 살아간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이미 구식이 된 지 오래다. 나 역시 부모님 시대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듯이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삶의 방식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기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도 서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관계를 해칠 수 있다. 조금씩 거리를 두고 살면서 알아도 모른 척하고, 잘해도 못하는 척하는 것도 부모가 할 일이 된 세상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분가를 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 나름대로 가정을 이끌어 가는데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필요가 없다.


세대차이가 별로 없는 형제들도 마음에 안 들면 티격태격하는데 부모와는 세대차이가 있어 여러 가지로 다르다. 큰아들이 둘째를 낳았을 때 1주일 동안 며느리 산후조리를 해주고 집에 오자마자 대상포진에 걸렸던 생각이 난다. 특별히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많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에도 아프면 안 되는데 하며 왔는데 건강하다. 먹고 싶은 것을 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해주고 있다. 빨래와 청소를 하고 틈틈이 손자를 안고 달래며 하루에 한 시간 정도밖에 나가서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 아는 사람은 없어도 지나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면 지루하지 않게 하루가 간다. 더 나이가 들면 이것마저 힘들겠지만 건강한 지금, 더 늦지 않게 딸이 아기를 낳은 것이 다행이다.


신후조리를 해주러 왔지만 별로 할 일이 없어 휴가 나온 것 같다. 오기 전에 무엇을 해줄지 막연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젊은이들의 생활방식을 따라 하다 보니 간소하고 단순하다.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지 않고 맛있는 음식 하나를 만들어 놓으면 맛있게 먹고 끝낸다. 밑반찬도 필요 없고 김치도 필요 없다. 어차피 모유수유를 위해 자극적인 음식은 안 먹는다. 예전 같으면 아침 굶는 것은 예사인데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열심히 찾아 먹는 것을 보니 에너지가 필요한가 보다. 젊은 사람들 좋아하는 음식은 손이 많이 가지 않고 소금 후추로 간을 하면 맛있게 먹는다. 간식으로 달콤한 머핀이나 케이크를 만들어주면 좋아해서 몇 번 만들어 주었다.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게 없는 것이 부모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나는 딸을 위해서, 딸은 손자를 위해서 희생하며 즐겁게 산다. 며칠 남지 않은 산후조리를 끝내고 돌아가기까지 딸이 회복해서 건강한 모습을 보고 가고 싶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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