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눈이 녹지 않고 군데군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저기 다 녹았는데 뭐 하느라고 녹지 않고 잔디 위에 누워 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향은 봄이 왔는데 북향은 여전히 겨울이다.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봄과 겨울을 한눈에 본다. 더러는 바짝 마른땅에 파릇파릇한 풀이 돋고 더러는 얼음이 녹아내려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고국의 봄소식은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이곳은 아직도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계절이 바뀌기가 손바닥 뒤집듯이 쉽지 않겠지만 가지 않으려는 겨울이나 오지 않는 봄이나 고집세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햇살이 고와 나가 보면 보기와는 다르게 바람이 차다. 춥다고 겨울옷을 입고 다니면 투박해 보여 보기 싫어도 따뜻한 게 좋아 여전히 두꺼운 옷을 입고 다닌다.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다. 북향으로 난 길은 어둡고 추워서 따뜻한 남향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본다.
오리 한쌍이 잔디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 먹고 있다. 멀리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왔을 텐데 이곳 날씨가 아직 추워서 괜히 미안하다. 먼 길을 날아왔는데 봄이 오지 않아 풀한 포기 나오지 않은 마른 잔디에 서서 먹을 것을 찾는 모습이 안타깝다. 머지않아 오는 봄을 기다리는 오리가 너무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라본다.
작년 이맘때에도 꽃샘추위로 엄청 추웠는데 먼 길을 오다가 길을 잃은 오리 한 마리가 동네에 있는 성당 앞 잔디에서 외롭게 앉아 있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쩌다 길을 잃었는지 오리가 많이 모여있는 공원에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어느 날 보니 오리가 보이지 않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을 놓았던 기억이 난다.
지난해 가을에 멋지게 물들였던 나무가 이파리를 다 떨어뜨리고 추운 겨울을 맞고 보내며 움을 틔우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움이 껍질을 벗으면 새파란 나뭇잎이 세상에 나올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학교 운동장을 지난다. 눈이 녹으려면 아직 멀었다. 갈매기 몇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놀이터에는 그네가 바람에 흔들릴 뿐 텅 비어있다.
작년 가을부터 길 건너에 있던 대학교 자리를 허물고 새 빌딩을 짓는데 크레인이 바쁘게 움직인다 어느새 지하를 다 짓고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빌딩이 다 지어지면 동네가 또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한동네에 오래 살다 보니 세월 따라 변하는 모습에 적응해야 한다. 땅이 넓은 이곳은 다운타운을 제외하면 단층 건물이 대부분이다. 물론 아파트가 많은 곳도 있지만 60년 전에 생겨난 우리 동네에 제일 높은 건물은 14 층 짜리 요양원 건물 하나가 시야를 가리는 유일한 빌딩이다.
얼마나 높은 빌딩이 지어질지 모르지만 동네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 같다. 커다란 아파트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춰진 빌딩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무엇이 되었든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조용한 동네에 큰 빌딩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좋은 점도 있지만 골치 아픈 문제도 생긴다.
길을 건너 공원으로 걸어본다. 파란 하늘 아래 새들이 날아다닌다. 원래는 학생들이 운동을 하는 운동장에 오늘은 아무도 없고 하늘을 나는 몇 마리의 새들이 차지하고 논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몰라보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공원을 감싸고 있다. 여름에는 각종 행사를 할 수 있는 커다란 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특별한 날에는 불꽃놀이를 하고 해마다 캐나다 데이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행사를 한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있어 가족이 즐길 수 있고 겨울에는 눈썰매를 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호수가 있어 오리들이 살아가고 사람들이 단체로 또는 가족 단위로 와서 바비큐를 하기도 한다. 공원 앞에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고 각 나라의 식당들이 모여있다.
공원을 만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공원의 나이가 마흔 살이 넘어서인지 나름대로 중후한 모습으로 동네를 지켜준다. 한 바퀴 돌다 보니 다리가 아프다. 몇 시간을 걸어도 끄떡없던 다리가 조금만 걸어도 피곤해진다. 많이 걷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매일 조금씩 자주 걷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니 무리할 필요는 없다.
가만히 집에 있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걷는 것이 좋다. 귀찮아도 일단 집에서 나오면 운동이 되니까 게으름 피우지 말고 걸을 수 있을 때 많이 걸어야 한다. 인간의 몸은 냉정하다. 쓰지 않으면 도태된다. 누워서 눈감고 있으면 편하지만 잠은 죽어서 실컷 자고 살아있을 때 열심히 움직이자.
길을 건너서 온길을 되돌아 걷다 보니 집이 보인다. 돌아갈 집이 있어 좋다. 나를 기다리는 집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여러 번 걸은 동네길이지만 걸을 때마다 새롭다. 매일 보고 또 봐도 좋은 내가 사는 동네에 오래도록 살고 싶다. 예쁜토끼 한 마리가 눈 녹은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집에 온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