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사이로 세상은 초록색으로 변했다. 반질반질한 연두색의 나뭇잎이 햇살을 보고 바람에 흔들린다. 부드러운 아기들의 살결 같아 살며시 만져본다. 어쩜 이리도 부드럽고 예쁜지 감탄을 한다. 해마다 봄이 되면 똑같은 모습을 보는데도 볼 때마다 새롭다. 우중충한 겨울옷을 벗고 산뜻한 봄옷으로 갈아입고 의젓하게 서 있는 나무를 보면 괜히 가슴이 뛴다.
봄은 희망이고 꿈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파란 하늘과 푸르른 나뭇잎을 보고 마냥 걸어본다. 하루가 다르게 숲이 꽉 차는 것을 본다. 어느새 곤충들도 세상을 구경하러 나와서 날아다닌다. 호랑나비와 흰나비가 훨훨 날아다닌다. 연분홍 모자를 쓰고 걷는 내게 자꾸 다가온다. 색이 고와서 내가 꽃인 줄 아나보다. 푸른 잔디가 곱게 펼쳐져 있어서 골프장을 연상하게 하고, 노란 민들레 꽃이 길가에 하나둘씩 피기 시작한다.
하얀 눈이 덮여 결코 봄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겨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래전부터 봄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의 눈은 참으로 간사해서 며칠 안 보면 잊는다. 봄은 이렇게 살며시 왔다가 슬그머니 가겠지만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은 가슴에 남는다. 계곡을 메꾸었던 두꺼운 얼음이 다 녹고 하늘을 안고 앞으로 흘러간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나 있는지 한없이 흘러간다. 숲 속의 오솔길에 자라는 풀들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동네 아이들이 나무로 지어 놓은 세모 모양의 집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나무집을 구경하려고 계곡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움직이는 무언가가 눈길을 끈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늑대가 계곡을 걸어간다. 사람 소리를 듣고 힐끔거리며 나무사이로 걸어가는데 늑대털색과 나무색이 같아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침 가지고 다니는 쇠방울을 힘차게 흔들었더니 언덕 위로 가는 것이 보여 안심했다.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우리가 할 말은 없다. 마주치지 않게 큰길로 다녀야 하는데 때로는 오솔길을 걷게 되기 때문에 방울을 가지고 다닌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날씨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는 계절이 되었는데 꽃가루가 난리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하얀 꽃가루 때문에 알레르기가 극성을 부린다. 재채기와 콧물이 괴롭힌다. 그렇다고 숲에서 마스크를 하고 다닐 수도 없고 며칠 다니다가 힘들면 당분간 집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자연이 좋아 자연을 찾는데 자연은 자연의 할 일을 해야 한다. 새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이다. 세월 따라 면역력이 약해지고 예전에 없던 증세가 나오는 것도 자연의 현상이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나무와 하늘이 만난다. 파란 하늘에 푸른 나무들이 세상을 내려다보며 웃는다. 나무는 하늘바라기가 되고, 나는 그들 바라기가 되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 없다. 숲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며 숲이 주는 행복을 나누면 된다. 새들은 저마다의 노래를 하고 다람쥐는 나무를 오르내리며 숨바꼭질을 한다. 나는 이대로 숲이 되고 숲은 나의 길을 안내한다. 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과 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계절 따라, 세월 따라, 봄과 여름도 만나고 가을과 겨울도 만난다. 비와 눈도 맞고 바람에 뿌리를 뽑힌 나무도 본다. 산책길에 서 있는 늙은 나무가 바람에 넘어지면서 옆에 있는 층계를 내리쳐서 부서졌는데 어제 보수공사를 해서 말끔히 고쳤다. 새나무가 하나둘 생겨나고 오래된 나무들이 하나둘 넘어지는 것이 마치 인간들의 모습이다. 이민초 40여 년 전 펄펄 날던 청년들이 이제 노인이 되어 하나둘 떠나는 것을 본다.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자연이나 사람이나 각자의 시간이 있어 영원히 살 수 없다. 아기 살같이 나오는 어여쁜 새싹들이 녹음을 이루고 열매를 맺고 단풍 들어 고별을 하면 한 해가 간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봄을 맘껏 즐기면 우리의 할 일은 다한 것이다. 계절을 따라 웃으며 한 세상 살면 된다. 건너편 숲에 있는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 새 한 마리가 앉아서 노래를 한다. 그리운 님을 기다리나 보다. 숲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