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아침이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다.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와서 시들어가던 산천포목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다. 화분에 심어놓은 고추가 축 늘어졌다. 고추를 심어놓은 화분 밑에 작은 접시가 있어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화분 흙에 물이 흥건히 고여있다. 물이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남편이 깜짝 놀라서 화분을 기울여 흙에 있는 물을 빼주고 나니 고추가 다시 살아난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은 물이 너무 없어도 말라죽고 너무 많아도 죽는다.
너무 오랫동안 가물어서 비를 기다렸는데 하루종일 비가 오니까 화창한 날씨가 그리워진다. 인간이 참 간사하다. 비가 며칠 더와도 되건만 벌써부터 비를 외면한다. 가물어서 큰 나무 주변에는 잔디가 다 타 죽어 맨살을 보이고 있다. 물을 주어도 죽은 잔디가 살아나지 않아 보다 못한 남편이 잔디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고 비를 기다렸는데 마침 비가 내려서 다행이다. 잔디가 새로 자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할 일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메말라서 푸석하던 잔디가 물을 먹어서 아주 부드럽다. 푸른 물결이 바람에 춤을 추고 텃밭에 있는 채소들도 건재하다. 깻잎은 끼니때마다 상에 오르고 고추는 꽃이 많이 펴 있다. 고추 꽃이 지고 고추가 달리면 따 먹을 수 있다. 오이도 꽃을 피우며 새끼손가락만 한 오이들을 매달고 있다. 머지않아 상위에 올라올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 텃밭 채소 덕분에 여름 한철은 반찬 걱정이 없다. 밥하고 찌개나 국을 끓이고 텃밭에 나가서 이것저것 따다 먹으면 맛도 있고 보기에도 풍성하다.
나이 들수록 단백질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채소가 더 좋다. 몇 가지 채소를 채 썰어서 밥 위에 놓고 고추장 한 숟갈과 참기름 한 방울이면 맛있는 야채 비빔밥이 된다. 먹기 좋고 맛있는 야채비빔밥을 먹으면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성격이 자상하신 아버지는 여름에 더우면 아이들을 위해 비빔밥을 비벼 주셨다. 커다란 그릇에 밥을 넣고 각종 야채를 넣어 만든 아버지표 비빔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아직도 그 비결은 모른다.
두 살 터울 육 남매가 둥근 상에 빙 둘러앉아 있고, 엄마는 비빔밥 재료를 준비해서 상에 올려놓고 계란국을 끓이신다. 아버지는 커다란 그릇에 재료를 하나하나 더하고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비는데 밥알이 으깨지면 맛이 없다고 숟가락을 세워서 양쪽 손으로 아기 달래듯 살살 비비고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밥 위에 한 바퀴 돌려 섞어 주면 맛있는 아버지표 비빔밥이 완성된다. 그렇게 만든 아버지표 비빔밥은 맛이 예술이다. 밥알이 살아있고 형형색색 싱싱한 채소가 참기름으로 반질반질 윤기가 돌면 우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숟갈을 들고 먹기 시작한다.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겨있는 비빔밥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고 우리들은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버지 비빔밥이 그렇게 맛있어?" 하시며 남은 밥과 반찬을 넣고 다시 비빔밥을 만드시던 생각이 난다. 이제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비빔밥을 먹고 자란 우리는 어쩌다 만나면 아버지 비빔밥 얘기를 하며 만들어 먹는다. 비빔밥은 반찬이 별로 없거나 입맛이 없을 때 먹으면 식욕도 돋아 주고 영양보충도 해 주는 음식이다. 안 그래도 요즘 식욕이 없고 입맛이 없는데 텃밭에 있는 야채로 비빔밥을 해 먹어야겠다. 만들기도 쉽고 맛있는 비빔밥으로 추억도 들추며 잃었던 식욕도 찾아야겠다. 아버지가 하시던 대로 밥알을 살리고 각종 채소를 넣어 예쁘고 맛있는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어보자.
깻잎을 씻어 열 장 정도 돌돌 말아서가늘게 채를 썰어 준다.파와 부추도 짤막하게 썰고양파도 얇게 채 썰어준다.노랑 빨강 주황색의파프리카가 비빔밥에 넣어달라고 나를 쳐다본다. 얇게 채를 썰어 놓으니 무지개가 뜬것처럼 환하다. 프라이팬에 계란 프라이를 만든다. 밥을 그릇에 담아 야채를 올려놓고 계란 프라이를 올려놓으니 비빔밥에서 해님이 떠오른다. 고추장 한 숟갈에 참기름을 돌리면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고 잃었던 식욕을 자극한다.
아.. 맛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나는 또 아이들에게 아버지표 비빔밥을 전승한다. 사노라면 추억을 먹고산다고 한다. 야채에 고추장을 넣어 누구나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비빔밥이 추억의 꽃으로 가슴에 피어난다. 비빔밥을 먹으며 아버지가 해 주신 비빔밥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긴다. 보고 싶어요. 사랑하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