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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Apr 27. 2020

봄이.... 나를 부른다

(그림:이종숙)


바람이 분다. 나무들이 춤을 춘다. 어제 세상을 뒤집을 듯이 불어대던 바람이 여전히 심하게 불어댄다. 며칠 전만 해도 눈으로 하얗던 뜰이 눈을 찾아볼 수 없다. 태양의 힘이 무섭다. 구석구석 쌓였던 눈을 다 녹여 누런 속살을 보인다. 봄을 기다려 왔는데 막상 봄이 오니 할 일이 태산이다. 봄이 오지 않았을 때는 봄이 오면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는데 막상 봄이 오니 걱정이 태산이다. 구석구석이 나를 쳐다본다. 외면하고 모른 체하며 무시했던 살림들이 저 먼저 봐달라고 들썩거리며 온통 난리다.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잠깐 쉬며 커피 한잔 마시며 순서를 정해야겠다. 모르는 체 묻어 두었던 겨울이 벌써 그리워지려고 한다. 왜 내가 봄을 그토록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백야현상으로 밤 11시가 되어도 훤한 이곳의 오뉴월이다. 할 일이 많지만 지금껏 미뤄뒀는데 봄이 왔으니 어서 무언가 라도 시작하자. 해도 길고 밤도 짧으니 생각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 버려야 할 것들도 많고 구분해야 할 것도 많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무언가를 시작하면 된다.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인데 봄을 기다린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봄이 오면 밖이 궁금해서 미루고 여름에는 이것저것 하다 보면 정작 할 일이 미뤄지고 가을이 되면 왠지 일이 손에 안 잡혀서 미룬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마음도 몸도 움츠려 들고 봄이 오면 한다고 봄을 기다리다 겨울을 그냥 보낸다. 그러다 보니 작년 아니 재작년부터 했어야 할 일을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아니지만 마냥 미룰 수도 없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 참 이상해서 시간이 없을 때는 시간이 나면 하겠다고 미루고 시간이 있을 때는 귀찮다고 미룬다. 정작 할 것은 하지 않으며 심심하다고 투정 부린다. 어차피 해야 할 것을 미룬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도 마냥 게으름을 피운다. 남은 시간이 긴 20-30 대 젊은 청춘도 아니고 시간이 짧아져 가는 이 나이에 자꾸만 미룰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뤄오긴 했지만 머리로는 다 생각을 해 놓았다. 쓸 것과 버릴 것 그리고 남에게 줄 것과 나눌 것을 생각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처리해야 할 것,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정리해야 할 것 그리고 하루빨리 당장 해야 할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급 할 것 없는 내가 이까짓 봄이 온다고 과속을 할 필요는 없다.


지금껏  초 스피드로 살아온 나는 이제 속도를 낼 필요가 없다. 나는 이제 국가공무원이다. 연금 수혜자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직장에 갈 필요도 없고 일을 안 해도 월급이 또박또박 나온다. 평생을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엄청 내고 살았으니 하나도 안 미안하다. 당연히 받을 것 받으니 눈치 볼 것도 없다. 나의 젊음을 바쳐 일했다고 나라가 효자 노릇하며 정확하게 준다. 내가 월급을 올려달라고 할 필요 없이 알아서 조금씩 올려준다. 나라에 빚진 것이 없으니 걱정도 없고 맘도 편하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천천히 살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국가 공무원이 된 뒤로는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진다. 특별한 날을 만들어 물건값도 할인해주고 전염병이 도는 요즘엔 노인들을 배려하는 쇼핑시간을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 쇼핑을 할 수 있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안 하는데 가 나 자신을 재촉하고 잔소리를 한다. 초저녁 잠이 많은 나는 밤 열 시를 못 넘긴다. 아홉 시 반쯤 되면 하품이 나오기 시작하고 열 시 전에는 눈을 감고 자리에 눕는다. 안 그러면 춥고 으스스 떨리며 눈이 감겨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잠을 잔다. 대신 아침에는 5시나 6시가 되면 눈이 떠진다. 세상모르고 곤하게 자고 나면 늦잠을 자고 싶어도 더 이상 잘 수가 없다. 옆에서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이 때로는 부럽다. 나도 한번 아침에 늦게까지 늦잠을 자고 싶은데 안된다. 그 시간에는 새들도 깨어 부지런히 아침을 먹느라 나무속에서 시끌시끌하다. 온갖 세상 소리가 다 들리니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어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난다. 몇십 년간의 습관이 이렇게 나를 만들었나 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늦잠을 잘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학교 다니고 직장 생활하고 아기들 낳아서 키우며 작장 생활하고 아침에 일찍 문을 열어야 하는 식당을 운영하며 하루도 늦잠을 자지 못했다. 어쩌다 너무 피곤하여 낮잠이라도 자고 나면 골치도 아프고 심장도 두근거려서 그나마도 의식적으로 피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 아홉 시나 열 시까지 휴식도 취하지 않고 쌓인 피로가 밤잠을 잘 자게 만드는 것 같다. 어쩌다 피곤하여 낮잠을 자려고 누우면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그냥 일어나게 된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상관없이  늦잠이나 낮잠을 잘 자는 것이 때로 부럽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내가 심심해서 뭐라도 한다. 옷장을 뒤집기도 하고 책장을 뒤집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심심하면 신발장도 뒤집고 그릇장도 뒤집으면 한 해가 정리가 된다. 아무것도 안 할 듯이 가만히 있다가 날 잡으면 무섭게 해 치우는 습성 때문에 나 자신도 놀랄 때가 많다.


집안일이라는 것이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정리한 사람만 알 뿐 아무도 모른다. 기껏 열심히 빨래 빨고 청소하고 정리해도 아무도 안 알아주면 맥이 빠지는데 그래도 자상한 남편은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칭찬을 해 준다. 아무것도 안 보는 것 같아도 옮겨놓고 바꿔놓으면 바로 알아차리는 남편이 고맙다. 특히 아이들도 없는 절간 같은 집에 이렇게 자상하고 친절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최고다, 이쁘다, 잘한다 하며 추켜세우는 것이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다. 아침부터 살림들이 나를 쳐다보는데 오늘은 무엇을 하며 남편의 눈길을 끌까 한번 고민 좀 해 봐야겠다. 일단은 옷장을 차지하고 있는 겨울옷을 내려다 놓고 봄옷을 꺼내 놓았다. 때로는 4월도 겨울처럼 춥기도 하는 이곳이지만 추우면 다시 꺼내 입더라도 지하실 옷장으로 내려다 놓았다.


막상 청소를 시작하니 겨울 살림이 한 보따리가 된다.. 모자나 장갑도 몇 개씩 되고 목도리도 여러 개다. 며칠 전에 빨았으니 잘 접어서 통에 넣어두고 나니 신발장이 보인다. 겨울 부츠가 몇 개씩 자리를 차지하고 우중충한 모습으로 날 쳐다본다. "너네들도 다 내려가자. 겨울에 다시 만나자." 하고 속삭이며 치우니 신발장도 훤하다. 몇 가지 안 했는데 집안이 봄으로 꽉 차 있는 모습이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겨울옷을 내려가야 하는데..." 하며 혼잣말을 했는데  다 치우고 나니 날아갈 듯 좋다.  나는 나대로 봄맞이 청소에 집안에서 바쁘고 남편은 지금 밖에서  딸기나무와 앵두나무를 전지 하느라 바쁘다. 각자 열심히 하고 이제 잘했다고 서로 칭찬해줄 일만 남았다. 아무도 몰라줘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하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단다. 계절의 시작인 봄이 왔다. 이제 미루던 청소를 시작하자.


청소하라고 봄이 나를 부른다.



원추리가 봄을 맞아 춤을 춘다.(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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