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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Apr 26. 2020

유언장이 가져다준 마음의 평화




종이 한 장으로 평화를 가질 수 있었던 날이 생각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언제 나는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 자신에게 여러 가지 물어본다. 하루도 수십 번씩 마음이 변하는 본능 때문에 행복이나 평화를 느끼지 못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 늘 무언가를 원하는 끊임없는 욕심으로 인간은 그리 쉽게 행복하거나 평화롭지 않다.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는 욕심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몸이 너무 힘들어 마음까지 괴로워지는 경우도 있고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웬만한 삶의 고난은 이겨내기도 한다. 물론 여러 가지 예외는 있지만 식당을 운영할 때 생각이 난다. 손님이 많아 힘들게 일을 한 뒤에 몸은 그야말로 으스러지는 듯 힘들었어도 돈을 세며 힘들었던 육신의 피로마저 날아간다. 오히려 손님이 오지 않아 손님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 날은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더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처럼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필요로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미루는 일중에 하나가 유언장 작성이다. 유언장이란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서 죽기 전에 가지고 있는 재산을 등분하고 사망 전후에 자신의 뜻을 적어 놓아 살아있는 사람들이 잡자기 찾아온 상황을 착오 없이 행하게 하는 문서다. 한국사람들은 유언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성인이 되는 18살에 유언장을 쓰기를 권고한다. 젊은 사람이라 가진 돈은 없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귀하게 여기는 물건도 있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뒤에 원하는 것이 있다. 아주 작은 것도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을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게 장기를 기증할 수도 있다. 변호사를 선임하면 비싸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적어서 면허증과 함께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가까운 형제들에게 미리 말을 해 두는 경우도 있다.



평화롭게 떠다니는 뭉게구름이  평화롭습니다.(사진:이종숙)


죽음을 생각하는 것에는 나이도 때도 없다. 영원히 살 수도 없고 언제까지나 건강할 수도 없다. 죽음이란 갑자기 몰래 찾아오는 도둑 같은 존재이니 항상 준비해야 한다. 태어 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고 그 죽음에 준비하는 여러 가지 중에 유언장은 가장 중요하다.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가 철도 없었고 죽는다는 것이 실감도 나지 않았지만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어쩌다 남편과 유언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시기상조라며 매번 아무결론을 내지 못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변호사에게 가지 않은 상태로 세월이 갔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조금씩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귀띔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막내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밖을 내다보며 오랫동안 살아온 이 집이 좋아 죽은 뒤에도 멀리 가는 것이 싫다는 생각에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우리 집 뜰에 뿌려라." 했더니 딸 왈 "뿌려? 그냥 이렇게 뿌려?" 하며 뿌리는 시늉을 해서 한바탕 웃었다.


나중에 우리가 죽으면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하면 아이들은 듣기 싫어하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름대로 기억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이들도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변호사를 선임하여 유언장을 작성하라는 말도 한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 이틀 미루고 변호사를 만나지 않은 세월만 보냈다. 머리로는 생각을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종이에 써서 놓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남편과 함께 쿠바에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요즘같이 사고가 많은 세상에 둘이 한꺼번에 변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기 전날 변호사 공증이 없는 유언장이라도 써서 우리의 생각을 적어놓으면 없는 것보다 백배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남편과 나는 종이 한 장씩 꺼내서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주소를 적었다. 머릿속에 있던 것을 세분하여 적고 프거나 사고가 생겼을 상황에 원하는 처분도 적어 놓았다. 적다 보니 마치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들이 있어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다는 편지까지 쓰게 되었다.



숲 한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이 힘차게 흐른다.(사진:이종숙)



간호학교를 다닐 때 유언장 작성을 해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젊었던 나이였기에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실감도 안 나고 특별히 비싸고 좋은 물건도 없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적어보면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이 날 것이라고 했다. 일단은 소중한 몇 가지를 써 내려가는데 이상하게 슬픈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닌데도 막상 이 세상을 떠난다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며 가슴이 조여옴을 느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놓고 간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슬퍼서 한참 울었던 생각이 난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 싫었다. 그 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시어머니도, 친정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시숙 들과 남동생도 저세상으로 갔다. 주위에 많은 분들이 떠나며 삶과 죽음은 어쩌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어지고 오늘 없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별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삶의 한 부분임을 느낀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며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마지막에 이름을 쓰고 싸인을 한 다음  중요한 여러 서류와 함께 친필로 쓴 유언장을 커다란 봉투에 넣어 봉하여 근처에 사는 작은 아들에게 전하고 다음날 쿠바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데 유언을 하지 않아 마음 한구석이 늘 찜찜했는데 변호사 공증은 안 받았지만 나의 뜻을 종이 한 장에 전하였다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아무런 사고 없이 우리는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왔고 그 유언은 봉투 안에 그대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종이 한 장이 준 마음의 평화는 엄청났다.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 확률은 반반이지만 안 생겨도, 생겨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었다. 아무도 모르는 인간의 마지막 순간이 종이 한 장으로 해결되지 않지만 아니 준비로 끝난 상황이지만 그 효력은 크다. 많은 사람들이 미루다 갑자기 생긴 사고로 남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서 한시가 급한 마음이 생겼다.



언덕너머에 행복이 있다네요.(사진:이종숙)


친서로 쓴 유언장은 봉투에 넣어진 채 서랍 속에 있었는데 지난 1월에 여행을 가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다시 유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드디어 우리는 변호사를 만나서 정식으로 유언장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서류에 원하는 사항을 적고 사인을 하고 봉투 하나를 들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왔다. 늘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유언장을 쓰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이제 그야말로 건강하게 살다가 때가 되면  편하게 죽으면 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 유언장을 작성한다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짐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젠가 떠난 뒤에 남아 내 삶의 마무리를 해줄 아이들을 위해 준비를 시작한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죽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조금씩 다가온다. 말로, 때로는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어느 날 그것조차 할 수 없는 날이 되어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


죽음이나 마지막 시간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음을 느껴가는 나이가 되어간다. 틈틈이 나의 뜻을 아이들에게 전하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나 서먹함이 없는 자신이 기특하다. 어쩌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자연의 모습이다. 세상에 생긴 모든 것은 시작으로  끝이 나고 그 끝을 이어 다시 시작이 된다. 영원한 것이 없고 세상은 쉬지않고  변한다. 오래된 것은 사멸하고 시작된 것은 끝을 향해 걸어간다. 사람의 감정도 사랑으로 시작하여 미움도 되고 후회도 하며 용서라는 또 다른 감정을 만들며 살아간다. 좋았던 것도 싫었던 것도 세월 따라 묽어지고 부정하던 것들도 어느 날 긍정이 되어 찾아온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종이 한 장이 이토록 나를 평화롭게 함이 좋다. 사람이 태어나면 출생신고는 부모가 해주지만 살다가 떠나기 전에 유언장은 내가 원하는 대로 쓰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넘어서고 있다. 석양은 빨갛게 산마루에 걸쳐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는 하루가 간다. 언제 할까 망설였던  떠나는 날을 위한 시작을 그렇게 했다.


종이 한 장의 커다란 의미를 느낀다.



다시 시작하는 계절...봄이 왔네요.(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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