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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Apr 29. 2024

바람이 불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봄이라는 것이 워낙 요사스러워 변덕이 심하다. 꽃피는 것 시샘하고, 새싹 나오는 것 방해하는 바람이 분다. 그냥 대충 부는 바람이 아니고 아주 작정을 하고 분다. 머리가 헝클어져 모자를 썼는데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불어댄다. 해가 나오면 따뜻하다가 구름뒤에 숨으면 겨울 이상으로 춥다. 얇은 옷을 입기에는 너무 춥고 두꺼운 옷을 입으면 볼상스러워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 봄이 와서 좋다고 하지만 봄인지 겨울인지 분간이 안 간다. 차라리 겨울이면 추우려니 하는데 이름은 봄인데 봄 같지 않으니 답답하다.


바람이 불어대니 심란하기만 하다. 봄이 봄 같아야 봄이라고 하는데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것이 봄이라고 한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기보다 여름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바람 불고, 비 오고, 춥고, 그러다 보면 5월이 되고 6월이 된다. 이곳의 봄은 그렇게 바람만 불다가 가버리고 여름을 봄으로 생각하고 텃밭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는다. 봄이 없는 곳에 여름은 봄처럼 사랑을 받는다.  태양은 뜨겁고 건조해서 땀이 나지 않는 이곳의 여름이 봄대접을 받으며 텃밭에 작물을 키운다.


오뉴월에 씨 뿌리고 칠팔월에 키워서 9월에는 추수를 하면 바로 겨울이 온다. 그나마 인디언 써머가 있어 햇볕을 나눠 받다가 눈이 오면 그만이다. 6개월간의 겨울이 길고 춥고, 오라는 봄은 오지 않고 바람만 잡고 가버린다. 그래도 덥지 않고 습하지 않은 여름이라 휴양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살인적인 더위로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집집마다 지하실이 있어 더우면 지하실로 가면 시원 하다못해 이불이 필요할 정도다. 짧은 여름이지만  그나마 작물이 자라서 웬만한 채소를 길러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몇 주 전에 친구가 모종 몇 가지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대로 계속 추우면 5월 말이나 되어야 텃밭으로 옮겨질 것 같다. 봄을 기다리다 지칠 때 즈음해서 봄이 오는 둥 마는 둥 하며 가버린다. 봄에 피는 꽃은 튤립이나 수선화인데 올해는 그나마도 봄눈 때문에 얼어 죽고 말았다. 이제는 사과꽃과 앵두꽃이 피기를 기다리는데 모르겠다. 해마다 사과꽃이 피고 앵두꽃이 필 때마다 춥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벌들이 오지 못한다. 지난봄에도 앵두꽃이 예쁘게 피어 좋아했는데 갑자기 눈이 오는 바람에 꽃이 다 떨어져 앵두가 열리지 않았다.


하늘이 하는 일이니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야속하기는 하다. 언젠가는 앵두꽃이 만발하고 날이 따뜻해서 앵두가 많이 열어 앵두주를 담았는데 올해는 어떨지 두고 봐야겠다. 술을 담아도 술 마시는 사람이 없으니 장식용이지만 올해는 풍년이 들기를 한번 기대하고 싶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이 아까워 몇 년 전부터 빨랫줄에 빨래를 걸어 말리는데 그것도 특별한 재미다. 별게 다 재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빨래를 널어 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촉은 정말 좋다. 세탁기에 넣어 빨아서 건조기에 말리면 편하고 부드럽고 간단하지만 빨랫줄에 널어 말린 빨래는 엄마 냄새가 나고 할머니 냄새가 나서 좋다. 이미 만날 수 없는 분들이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하며 만난다.


빨래뿐이 아니다. 생전에 엄마는 햇볕이 아깝다고 볕이 잘 드는 곳에 무와 호박을 말리면 기가 막힌 반찬이 나온다. 무말랭이와 호박꼬지의 맛은 먹어본 사람만 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특별한 감촉과 맛이다. 여름이 짧은 이곳은 채소를 말리기에는 부족하여 매번 실수를 한다. 뒤집어지고 비 맞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하는 정성이 필요한데 정성이 부족한지 게으른 건지 몇 번을 하다가 곰팡이가 생겨 버리고 말았다. 무엇이든지 사다가 썰어 말려 놓으면 겨울에 입맛 없을 때나 신선한 채소가 귀할 때 만들어 먹는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한다.


할 일 없는 여름에 뒤뜰에 앉아서 파란 하늘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벌이나 나비들이 꽃을 찾아오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급하게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멍 때리는 재미에 빠졌다. 눈 오고 추운 날은 벽난로에 장작을 태우며  화려한 불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불을 보고 멍을 때린다. 삶이란 어쩌면 널어놓은 빨래가 말라가는 과정이고, 마른 장작이 태워지는 모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하고 더러운 모습이 어떤 과정을 거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하루하루가 재미있을 수 없고 매일이 지겨울 수 없다.


재미가 있어도 근심걱정이 따라다니고 지겨운 날도 나름대로 재미를 찾으면 좋은 날이 된다. 봄이 오지 않는다고 짜증만 낼 수 없고 겨울이 길다고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다.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연을 따라야 한다. 길고 긴 겨울 동안 추위를 이겨내고 아무것도 없는 땅에 올라오는 싹을 보면 자연의 섭리는 정말 위대하다. 한 해 동안 할 일을 다하고 겨울이 되면 멋지게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다. 받은 것을 감사하고  버리고 비우며 미련 없이 후회 없이 가는 자연의 모습을 닮고 싶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 속에도 치열한 삶과 죽음이 있고 경쟁이 있고 싸움이 있다. 사람도, 동물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살지만 점점 잔인해져 가는 사회가 염려스럽다. 남을 밟고 죽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늦게 와도 세상이 돌아가고 겨울이 길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고 자신을 억누르는 짐만 많아질 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세상이 돌아간다.


(사진: 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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