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온 비로 계곡에 물이 많아졌다. 그동안 폭염과 가뭄으로 말라 있던 계곡에 물이 콸콸 흐르는 것을 보고 있는 눈이 시원하다. 나무들에게 물을 다 빼앗긴 계곡이 말라가고 이끼가 끼어 있었는데 이끼 낀 자갈도 보이지 않고, 흐르는 물 근처에 서 있는 나무들이 계곡물에 비추어 멋진 그림이 된다. 사람의 손으로는 만들 수 없는 그야말로 신만이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다. 어느새 계절을 알아차린 풀들이 영글어 가고 씨를 물고 서 있던 산나물들도 씨를 땅에 쏟아내며 하나 둘 넘어지고 쓰러진다.
봄이 되기도 전부터 얼은 땅을 뚫고 세상에 나오는 풀들의 시간은 얼마 안 남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땅을 덮던 풀들인데 계절의 변화에 고개를 숙이며 힘을 잃어 간다. 무덥던 폭염은 어느새 꼬리를 내리고 서서히 가을을 맞이하려 한다. 누가 뭐라 해도 가겠다는 여름을 잡지 못하고, 오겠다는 가을을 막지 못한다. 어느새 나무꼭대기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여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숲 속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다람쥐들의 발길이 바빠지는 게 얼마 남지 않은 여름에 밀린 일을 하려나 보다.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떼로 날아다니며 숲 속의 침묵을 깬다. 새들의 의리는 대단하다. 무엇이든지 먹을거리가 생기면 모두에게 알리고 함께 모여 위계질서를 지키며 나누어 먹는다. 사람들은 배가 불러도 과식을 하여 병을 만드는데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지 않는다. 쌓아 놓고도 더 쌓아놓으려는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집이 없어도, 먹을 게 없어도 욕심부리지 않고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동물들의 슬기를 배우고 싶다.
계곡옆에 해마다 피는 연보라색 들꽃들이 곱게 피기 시작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피고 지는 아름다운 들꽃들은 올 때를 알고 가야 할 때를 안다. 어제 보지 못한 꽃들은 오늘 보고, 오늘 보지 못한 꽃들은 내일 보면 된다. 새파란 잎사귀 뒤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산딸기를 따 먹으며 걷는다. 숲은 친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비밀스러운 장소다. 가까이 가야만 만나는 진실처럼 조금씩 다가가면 깊은 마음을 알 수 있다. 멀리서 딱따구리가 나무 찍는 소리로 숲의 침묵을 깨고 숲에 사는 친구들이 아침잠에서 일어난다. 다람쥐가 숨바꼭질하고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한다.
지난해 여름에 손주들과 재미있게 딸기를 따 먹던 곳을 가보니 올해는 딸기가 없어서 약간 서운하지만 내년을 기약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산책로를 가다 보면 허물어진 까치집이 보이고,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듯한 집도 보인다. 깔끔하게 사는 집도 보이고, 한집에 차가 5대가 주차되어 있는 집도 보인다. 며칠 전에는 내린 비로 나무가 쓰러진 채 누워있고, 버섯을 기르며 누워있는 나무도 보인다. 어느새 산나물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여기저기 단풍잎도 보인다.
숲은 볼 것이 많아 눈이 바쁘다. 하얀 눈이 쌓인 겨울에는 봄이 영영 올 것 같지 않은데 봄은 약속이나 하는 듯이 와서 온갖 다른 새싹으로 숲을 단장한다. 녹음진 여름에는 겨울을 잊게 하고 덥다고 불평을 하다 보면 아침저녁으로 선선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저마다의 삶을 열심히 살며 할 일을 하는 숲은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배려하며 살아간다. 잘났다고 우쭐대지 않고 못났다고 기죽지 않는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같이 살고 때가 되면 소리 없이 떠난다.
노랗게 피었던 민들레의 뒤를 이어 하얀 토끼풀이 민들레가 있던 자리에 피어난다. 내 자리라고 밀쳐내지 않고 서로가 함께 상생하는 숲 속에는 영원불멸의 진리가 있다. 오솔길은 풀과 모기가 차지하고 있어 가 본지 오래되었지만 풀들이 생을 마치고 누우면 다시 들어가 걸으면 된다. 계곡을 지나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집으로 가는 길인데 오늘은 더 많이 걷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간다. 오늘따라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며 가며 인사를 주고받는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을 하며 지나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주 가는 곳이라서 몇 번 만나면 친구가 되기도 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다. 오래전 우리가 식당을 운영할 때 꼬마 손님이 있었는데 어느새 어엿한 어른이 되어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서로를 알아보고 한참을 서서 이야기했다. 많이 주고, 값이 싸고, 맛있고 친절하였다고 하는 말을 하면서 언젠가 한번 갔는데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서 많이 서운했단다.
오랫동안 식당을 해서인지 식당을 그만둔 뒤로도 여기저기서 손님들을 만나는데 그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어 기분이 좋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간다. 이름 모를 빨갛고 하얀 열매가 예쁘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내일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는 발길이 가볍다. 숲에서 만난 행복을 안고 시작하는 오늘, 빨갛게 익어가는 체리가 곱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