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높고 푸르다. 가을이 다가온다. 다사다난하던 여름이 가려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낮에는 덥지만 어쩌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가을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린다. 이민 생활 45년이 되어가니 노래가사가 점점 흐릿해진다. 부를수록 정다운 우리나라 가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쉬워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힘차게 불러본다. 노래가 좋아 한없이 불렀던 노래인데 세월 속에 묻힌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표정을 보면 희망이 생긴다. 그들의 삶이 힘들어도 지나가는 비바람에 불과하다. 누구나 한번 젊은 시절을 겪으며 살아간다. 웃는 모습이 좋고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린다. 모든 것이 귀하던 그 시절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희망이 없고 암담하기만 하다고 했던 그날들은 희망의 날개를 퍼덕이던 날들이다. 세상은 변하고 생각도 변하여 옛날과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아름다웠던 그날은 추억 속에 살아있다.
아이들이 자라서 독립을 하고 저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일하고 놀고 아이들 키우며 좋아하는 일들을 쫓아다니며 즐겁고 정신없이 산다. 아이들이 다녀간 주말에 나는 다시 옛날 젊은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맛있게 먹는 그들을 보며 행복해한다. 몸은 피곤하지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고맙다. 엄마 아빠 집이라고 찾아와 잘 먹고 편히 쉬다 가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어릴 때 좋아하던 음식을 해주고 두 아들네 식구들과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딸은 멀리 살고 있어 참석하지 못해 아쉽지만 영상통화를 하며 만난다. 오래전에는 생각지 못한 삶으로 산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난다. 같이 만나서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산다.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자연재해는 막지 못한다. 기상청의 기술이 발달하여 미리 대비를 하지만 자연의 힘을 막을 수 없다. 바다수면이 높아져서 섬이 가라앉아 사라지고, 태풍과 지진이 나고, 화산이 터지는 모습은 무시무시하다. 무엇이 자연을 화내게 해서 저런 일이 생기는 것인가 하지만 그저 자연의 순환이고 현상이다. 물론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여 생긴 결과임을 인정한다. 산을 깎고 강을 막으며 개발이라는 명목을 앞세운 무모한 행동은 발전하는 계기도 되지만 생각지 않은 자연의 악순환을 가져오기도 한다.
해마다 산불이 난다. 산에 나무가 타고 비가 오면 흙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면 결국 자연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지경이 된다. 서로의 잘못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해결책은 되도록 자연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 않다. 사람은 별것 아닌 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한다. 참고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인내가 없다. 조금 힘들면 불평하고 좌절하고, 조금 좋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하여 좋아한다.
그것뿐이랴. 변덕은 그야말로 죽 끓듯 한다. 좋아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괴로워하고 원망하고 후회한다. 어차피 살아가야 하는 인생살이인데 마음대로 안된다고 별별 생각을 한다. 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치고 세상은 물바다가 되고 산불이 나서 온 동네를 삼킨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살기 위해 위해 그곳을 떠나 대피하는 것 밖에 없다. 집이고 차고 짐승이고 다 버리고 인간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떠난다. 돌아온 곳은 수해와 화염이 할퀴고 간 상처로 잿더미가 되고 물에 잠겨 망가진 살림살이가 자리를 지킨다.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른 체하고 자연은 자연의 할 일을 하고 가 버렸다.
얼마 전에 난 재스퍼 화재 현장을 보여주는 뉴스를 보며 황당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던 건물이 재가 되어 텅 빈 동네의 모습이 무섭기까지 하다. 더운 여름에 바람이 불면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바람이 불면 봄이 온다고 좋아하는데 산불이 바람을 타고 와서 사람들의 삶터를 삼킨 범인이다. 주민들이나 관광을 온 사람들 모두 불에 타는 동네를 뒤로하고 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떠나갔을 터인데 다 타버린 삶의 터전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비는 동네를 삼켜버린 뒤에 내리기 시작하고 바람은 동네를 다 태우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비가 오기를, 바람이 멎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타들어가는 동네를 지켜보며 떠나는 발길을 재촉했던 시간들이 지나 이제는 모두 지나간 시간들이 되어 복구를 기다린다. 친구의 집은 3분의 1이 타고 그곳에서 장사를 하며 사는 젊은 사람들의 가게와 집은 다행히 괜찮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연이 지구를 할퀴고 휘저으며 상처를 남긴다. 없어진 나무들이 자라고 동네가 다시 재건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불의 고리로 번져가는 강진과 화산의 두려움이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 대처하며 살아야 할 숙제이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나뭇잎은 하나둘 물들어 간다. 열매는 익어가고, 들판의 밀과 유채가 누렇게 익어간다. 뜰에 있는 마가목 나무 열매가 빨갛게 물들어가고, 풀들은 시들어 가며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하는 자연이 주는 혜택을 감사하며 살아갈 때 안전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가을이 온다.가을노래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