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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낭만의 데이트... 떠나보니 좋다

by Chong Sook Lee


"우리 언제 제스퍼 온천 한번 갈까요?"
어제 친구 집 방문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우연히 던진 말이다.
“그럴까? 그럼 내일 아침에 가면 되겠네."
"내일?"
"맘먹은 김에 바로 가자고."
"그럽시다."

남편과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 오늘이 왔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오는데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며 안 가기로 하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우연히 제스퍼 날씨를 보니 비는 안 보고 흐리기만 한다고 한다.

"오늘 비 안 온대요".
"그래? 그럼 갑시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괜찮을까요?"
"거기에는 비가 안 온다고 하니까 가보자고."
"갑시다 그럼."

순식간에 내린 결정이다.
우리 부부는 매번 이렇다.
생각하고 말하고 동의하고 결정짓고 행동에 옮긴다. 이런저런 생각하고 계산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알기에 바로 결정하며 산다.

오랜 세월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일요일 하루는 쉬었다. 쉬는 날 하루종일 밀린 일을 하며 일주일 피로를 풀기 위해 쉬기도 바쁜데도 어딘가 떠나고 싶으면 망설임 없이 훌쩍 떠나 일일 여행을 하였다. 가면서 피곤하면 차를 세우고 15분 정도 쉬어가면 다시 활력이 생긴다. 음악을 틀어놓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고 틈틈이 간식을 먹으며 간다.

가는 시간만 4시간 걸리는 곳에 있는 온천은 힌톤과 재스퍼 중간에 있다. 고속도로에서 미엣 온천까지 들어가려면 자동차로 족히 25분 정도 좁은 산길을 오르내리며 가야 한다. 비가 오면 미끄러워 위험할 텐데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비가 오고 안 오고는 가봐야 안다. 일단은 아침을 먹고 간식거리를 싼다. 간식이라야 삶은 계란과 콩우유, 초콜릿과 어제 먹다 남은 떡 몇 개 그리고 오렌지와 커피를 싸가지고 떠난다.


그야말로 가볍게 떠나는 소풍이다. 비는 주책없이 마구 쏟아지고 출근시간이라 길이 막힌다. 순간 이대로 비가 계속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갈까 하는데 길이 뚫린다. 이제 시내를 벗어나서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뻥 뚫린 도로가 우리를 반긴다. 비는 장대비로 변하여 차 유리창을 심하게 때리며 사정없이 내린다. 철없는 노인 둘이서 객기를 부린다. 꼭 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 빗속을 뚫고 재스퍼로 향한다.
"비가 오면 어떻고 바람이 불면 어때. 우리 둘이 함께 있으니 걱정 없어. 비 오는 날 낭만의 데이트를 하면 되잖아."
남편의 말에 용기가 나서 콧노래로 응답한다.
'비가 와도 좋아, 눈이 와도 좋아, 바람 불어도 좋아.' 어디선가 들어 본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린다.

비는 오지만 4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니 걱정할 것 없다. 구름이 하늘을 덮어 어둡지만 그토록 무섭게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춘다. 앞으로 난 길을 신나게 달린다. 소풍 가는 어린이처럼 설렌다. 식당을 끝내고 제일 먼저 달려온 곳인데 그 뒤로 코로나 전쟁으로 가지 못하다가 이제야 간다. 내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4시간 떨어진 곳인데 부담 없이 가서 바람 쐬고 오는 곳이다. 가다 보면 중간에 에디슨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쉬고 간다.


여전히 하늘은 구름이 많이 껴서 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비가 않오니 좋다. 오히려 해가 쨍쨍 내려 쬐는 더운 날 보다 더 좋다. 조석으로는 바람이 차지만 단풍 든 나무들은 얼마 없다. 지난번 산불 때문에 재스퍼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온천은 개방을 해서 다행이다. 록키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멀리 보이는 바위는 인디언 추장이 누워있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이민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가슴이 뛰던 곳이다. 그 뒤로도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온 곳인데 그 느낌은 여전하다.


계절에 따라 온갖 다른 모습을 하는 이곳의 매력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아이들과 스키를 타고 캠핑을 하던 옛날 추억이 생각난다. 친구들과 텐트를 치고 자던 날, 강 낚시를 다니며 캠핑하며 불 피고 놀던 날들이 스쳐간다. 오래전, 그러니까 정확하게 35년 전에 시어머니가 오셨을 때, 케이블카를 타고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풍경은 지상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에델바이스라는 보라색 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던 기억도 난다.


한국에서 누구라도 오면 영락없이 찾아오는 이곳은 마치 고향 같은 곳인데 이제는 두 늙은이 둘이서 비 오는 날 낭만의 데이트를 한다. 들판에는 소와 말들이 풀을 뜯고, 여러 가지 곡식들이 익어서 황금물결로 출렁거린다. 크고 작은 차들이 오고 가지만 참으로 한가한 날의 드라이브는 평화를 안겨준다. 산들이 누워서 어서 오라며 팔을 벌린다. 멀리서 고속도로 게이트가 보인다. 재스퍼에 들어가려면 통행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돈을 받는 사람들이 없어 의아해하며 그냥 통과해 간다.


앞으로, 뒤로 바위 산이 즐비하게 서있다. 힌톤을 지나 온천으로 가는 길목이다. 왼쪽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캐빈들이 예쁘게 가을을 맞고 있다. 캐빈을 끼고 오르는 오른쪽 길에는 계곡이 있어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오늘은 주중이고 비가 와서 인지 여행객도 별로 없다. 산불로 인해 출입이 금지되었던 이곳은 지난 8월 24일 다시 개방이 되었다. 산속에는 가을이 빨리 오기 때문에 가을을 만나러 왔는데 몇몇 나무만 단풍이 들어있다. 숲을 가로지르는 좁은 길을 따라 앞으로 간다. 길이 엄청 가파르게 되어있어 조심하며 간다.


평소 같으면 주차장이 붐비고, 산짐승들이 나와서 여행객을 맞을 텐데 비가 와서 인지 아니면 산불여파인지 한가하다. 몇몇 여행객 이외에는 사람들이 없어 탈의실과 온천이 그야말로 여유롭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텅 빈 온천장에서 황제온천을 한다. 날이 추워서 온천물에서는 하얀 김이 올라온다. 어깨까지 오는 물에 얼굴을 내놓고 서서 둘러쳐진 산을 바라본다. 언젠가 여름에 한번 왔을 때, 천둥번개가 심하게 치던 날이 있었다. 번개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탈의실에서 천둥번개가 멈추기를 기다리던 날도 생각난다. 가을에 때로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온천을 하기도 한 추억 많은 곳이다.


온천장에서 입장료를 내며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야 하냐고 물어보니 온천만 다녀오면 통행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30분간의 온천을 마치고 나오니 배가 너무 고프다.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며 피로를 푼다. 앞으로 4시간을 달려야 하지만 너무나 개운하다. 오랜만에 부려본 객기 덕분에 가을 여행을 톡톡이 한 날이다. 멋진 산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가을이 살며시 내려앉는다. 떠나보니 좋더라는 말이 생각난다. 비 오는 날의 낭만 데이트... 떠나보니 정말 좋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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