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까마귀가 깍깍댄다. 어제 하루종일 날씨는 청명 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결국 오늘은 가을비가 오락가락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곱게 물든 나무들이 힘없이 떨어진다. 낙엽은 어디로 갈지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웅덩이에 앉아서 쉬고,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인간의 마지막 모습 같아서 서글프다.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시간이 되면 낙엽이 되어 가는 것이다.
계절은 기다리다 보면 왔다가 잠시 머물다 금방 가기 때문에 다시 그리워진다. 가을이 오나 보다 했는데 물들기 바쁘게 떨어져 낙엽이 되어 뒹굴어 다니는 것을 보니 이러다가 어느 날 하얀 눈이 세상을 덮는 겨울이 올 것이다. 작년에는 겨울에 눈이 별로 안 오고 춥지 않아 아이들이 연말연시에 오고 가는 게 고생스럽지 않아 좋았다. 아이들이 왔다 가고 난 뒤에 혹한이 들이닥쳐 영하 40도, 50도의 추위가 왔지만 벽난로에 장작을 피우며 강추위를 넘겼다.
날씨도 고집이 있는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에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더운 날은 시원한 곳을 찾아다니고 더위를 피해야 하고, 추운 날은 실내에서 기다리면 추위가 물러간다. 다람쥐들이 까먹은 헤이즐넛 껍데기가 여기저기 쌓여있다. 여름에 나뭇잎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헤이즐넛을 보고 나중에 익으면 먹어볼까 했는데 야속하게도 다람쥐들이 하나도 안 남기고 다 까먹었다. 이곳의 혹한을 이겨내려면 미리 잘 먹어두어야 하지만 어쩌면 한 개도 남겨놓지 않고 다 까먹었는지 신기하다.
나뭇잎들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숲이 휑하다. 여름에는 숲이 녹음이 져서 숲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건너편 숲에 누가 걷는지도 보이고 새들이 노는 것도 보인다.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나뭇잎들이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 어디론가 흘러간다.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나러 가나보다. 가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쉬고 있는 낙엽도 있고, 열심히 앞만 보고 가는 낙엽도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낙엽이 산책길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한때는 나무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뭇잎들이 없어지니 하늘이 대신 얼굴을 내민다.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어 숲을 밝히고 서 있다. 어찌나 예쁜지 이리저리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본다. 날마다 보는 나무지만 해마다 단풍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 물들지 못한 채 떨어지는 이파리도 있고, 빨갛다 못해 검은색이 되어 떨어지는 이파리도 있다. 며칠 사이로 텅 빈 숲에는 여름동안 보지 못한 나무와 풀들이 누워서 하늘을 본다. 이제 머지않아 찾아오는 겨울을 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이다. 오다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연은 자연의 할 일을 하며 피고 진다. 매번 무심히 지나치던 이곳은 아들네가 사는 동네에 있다. 우연히 한번 들려서 걷기 시작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매력이 있어 자주 온다. 자연 그대로의 허름하고 수수한 모습이 좋다. 언젠가부터 코요테 식구들이 이사를 와서 살고 있는 숲이다. 지나가다 우연히 몇 번 만나기도 했는데 별 탈은 없었다. 사람들이 해하지 않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눈이 올 듯이 날이 차다. 비가 온다고는 하는데 몇 방울 떨어지더니 멈추고, 구름만 잔뜩 껴있는데 화려한 단풍잎 덕분에 숲이 훤하다. 다람쥐들이 엄청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어딘가에 겨울 동안 먹을 것을 쌓아놓는 모양이다. 이곳은 겨울이 길어 준비를 단단히 해 놓아야 한다. 동물들도 겨울을 준비하는데 나는 내 인생의 겨울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먹고 놀고 잠만 자며 언제 겨울 준비를 하려는지 모른다. 둘러보면 할 일이 산더미인데 하루이틀 미루며 게으름만 피고 산다.
내일이 안 올지도 모르는데 내일로 미루며 산다. 하루하루 세월 따라 더 늙고 움직이기도 힘들어질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 미루다가 후다닥 해버리는 습성을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 머릿속이 복잡하니까 생각하지 말자. 노는 것도 한때이니 열심히 놀면서 나중에 시간 내서 하면 된다. 지난여름에 멀쩡하게 서있던 나무하나가 쓰러져 있다. 누군가가 베어버린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의문이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부러 자른 나무를 보면 마음이 안 좋다. 심심하면 집에서 낮잠이나 잘 것이지 왜 숲에서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자르고 다니는지 모른다.
단풍을 보고 낙엽을 밟으며 걷는 숲길에서 평화를 얻는다. 서로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안다. 피어나서 자라던 이름 모를 풀들이 힘없이 늘어지고 누렇게 되어 서로 기대며 계곡옆을 지키고 있다. 수도 없이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계곡에 쌓여 흐르는 물을 막는다. 어디선가 떠내려온 나뭇가지들도 계곡에 누워있어도 물은 여전히 흐른다.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흐르는 계곡물이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정신없이 살아온 날들이 흐르는 계곡물에 보이고 주위에 서있는 나무들이 말간 계곡 물에 안겨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