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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Oct 26. 2020

길 따라 계절 따라... 세월을 낚으며 산다


(사진:이종숙)



가을 같은 겨울이다. 며칠 전 겨울이 뿌린 눈이  녹고 다시 늦가을의 모습으로 서 있다. 산책길이 남편과 나만을 위한 길처럼 아무도 걷지 않는다. 날씨가 추워지니 조용하다. 땅이 얼어 발자국 소리가 숲을 깨운다. 길에 떨어진 낙엽은 밤새 더 오그라 들고 옆에 서있던 잡풀도 새까맣게 얼어 푹 쓸어져 있다. 까마득한 계곡물을 보며 앞으로 열심히 걸어간다.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긴 했어도 아직은 눈도 없고 숲 속은 그리 춥지 않다. 오며 가며 거의 날마다 찾아온 이 길이지만 매일 올 때마다 새롭다. 어제 본모습이 아니고 조금씩 변하는 모습에 처음 온 길처럼  설렌다. 멀쩡하게 서있던 나무가 오늘은 비스듬히 서있고 비스듬히 서있던 나무가 누워 있다. 우리가 모르는 숲 속의 질서가 보인다. 새로 나서 자라다가 앞서고 뒤서며 갈길을 가며 언제 떠날 줄 모르며 살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우리네를 닮았다.


오는 날은 알아도 가는 날은 모른다는 말처럼 멀쩡하게 서있던 나무도 어느 날 보면 넘어져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있다.  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구름 낀 하늘을 쳐다보니 지난날을 생각하며 상념에 젖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만 살아온 이민생활 40년 동안 특별히 내세울만한 것은 없지만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아이들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며 자손 번창하고 이웃에게 해 되지 않게 잘 살아가니 내 나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나? 가을 하늘은 고 나무들은 여름내 서 있던 곳을 여전히 잘 지키고 서 있다. 날씨가 춥지만 집에 있는 것이 아까운 생각에 남편과 둘이 집을 나섰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방으로 난 둘레길에 물도 있고 나무가 많은 숲이 있다. 계곡을 걸어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살얼음이 얼은 계곡물인데 가운데로 물이 힘차게 흐른다. 


갑자기 밤 온도가 떨어져 오솔길이 얼어 땅이  딱딱하여 걷기가 조금 힘들어 휘청거리며  오솔길을 걷는다. 구름 뒤에 숨어있던 해가 얼굴을 내미니 세상은 갑자기 환해진다. 물 위에 비치는  햇살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건너편 길가의 모습들이 그대로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한없이 걷다 보니 산책길이 눈에 보인다.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산길로 접어드니 그곳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계곡에서 올려다본 산길은 그저 풀숲에 길이 있는 것 같았는데 막상 올라와서 걸어보니 환상적이라 할 정도로 아름답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하늘로 향하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기대어 서 있다. 낙엽은 산책길을 덮고 나무 사이로 새들은 춤을 춘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행복해한다. 문명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숲과의 대화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 멀리 물은 제 갈길로 가고 계곡은 무척 가파르다. 가다 보니 둘레길은 자취를 감추고 길인 듯 길이 아닌듯한 길이 있어 따라가 보았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절벽 아래로 직행할 정도로 길이 좁아 조바심하며 길을 따라 걸어갔다. 아슬아슬하게 그 절벽길을 넘어가니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다. 모험의 짜릿한 스릴이 무서웠지만 가슴을 뛰게 한다. 먼 여행은 오지 않았지만 소소한 일상 속에서 하는 가벼운 산책으로도 이토록 가슴이 뛸 수 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숲 속에 있는 오솔길을 조금 걸어가다가 인적이 거의 없는 그곳에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개가 힘들어할 때까지 걷는다며 급하게 간다. 지금은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앞이 보이지만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 오늘처럼 걷기 힘들 것이다.




(사진:이종숙)



단풍이 아름다울 때 좀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약간은 후회가 되었지만 숲이 우거져 여름에 보지 못한 것을 지금은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어디선가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날아와 길옆에 나무에 앉는다. 무엇을 하나 보니 죽은 나무에서 벌레를 잡아먹으려고 부리로 나무를 열심히 찍어댄다. 옆에 나뭇가지가 흔들려서 자세히 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와 큰 나무를 오르내린다. 겨울이 다가오니 나름대로 열심히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녀야 할 것이다. 숲은 숲대로 바쁘게 돌아간다. 엊그제 누군가가 새먹이를 커다란 병에 꽉 차게 걸어놓고 같는데 오늘 보니 거의 다 없어졌다. 온갖 새들이 바쁘게 날아와서 먹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생긴 공짜 밥이니 신나게 먹으러 온다. 숲을 걷는 사람들은 지나가며 위험한 가지도 치워주고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게 나무도 막아주며 배려하며 걷는다.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들의 세심하고 따뜻한  마음에 감사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우리 서로가 알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만 살지 않고 내일이 있기에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된다. 한참을 그렇게 숲 속을 걷다 보니 조그마한 목조 다리가 보이고 둘레길은 또 다른 곳으로 나 있어서 우리는 차를 세워둔 곳에 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곳은 아까 숲의 초입에 보았던 계곡물이 흐르던 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잘 닦아놓은 길은 아니지만 산책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조촐한 오솔길을 걸으며 산세를 음미했다. 아마도 수억 년 전에는 산새가 험난한 산이었을 것처럼 높고 낮음이 심하다. 나무들도 빽빽하고 숲이 깊어서 그런지 오다 보니 쓰러진 백양나무에 영지버섯 종류의 하얀 백지 버섯이 참으로 예쁘게 뽀얀 살을 보이며 피어 있었다. 하늘이 조금씩 구름을 벗고 파란 얼굴을 내 보인다.


계곡물을 끼고 오르내리며 낙엽을  밟으며 하늘을 보고 흐르는 물도 구경하니 걱정 근심도 다 사라지고 세상이 다 내편인 듯 기분이 좋다. 길 따라 가을 따라 걸은 2시간 정도의 산책이었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고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나무가 있고 물이 있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숲에 우리도 자연이 되어 그들과 함께 있음에 행복하다. 정신없이 살아온 남편과 나에게 이런 특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다. 가을의 옷을 벗어 발가벗은 숲은 그야말로 원초적인 모습으로 거짓을 버리고 서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뭇가지가 어깨를 마주대고 손을 맞잡고 겨울을 산다. 나도 덩달아 나무처럼 거추장스러운 마음의 욕심을 털어내고 평화를 만난다.


잎을 만들기 위해 애쓰던 여름을 보내고 다 떨어뜨린 숲에서 많이 버리면 걱정 근심도 사라지는 만고의 진리를 배운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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