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람 따라 세월 따라... 춤추는 숲

by Chong Sook Lee


하늘을 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어제의 회색빛 하늘과는 딴판이다. 눈 쌓인 숲을 걸으며 두리번 거린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 사람들은 싸우는데 숲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순응한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몸을 맡기고 흔든다. 거부하지 않는 자연의 매력이다. 세상에 오는 것은 과정과 결과가 있다. 선은 선을 낳고 악의 씨앗은 악의 열매를 맺는다. 저마다의 삶을 살며 서로를 감싸고 의지하는 숲에는 싸움이 없고 평화가 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오르려 애쓰지 않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파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나무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하늘을 보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살다가 간다. 숲에 오면 삶이 보인다. 새로 나오는 나무들이 보이고 삶을 다 살고 넘어진 나무들이 보인다. 옆에 서 있는 나무에 기대며 겨울을 맞은 나무도 보이고, 구멍 나고 해진 나무들도 보인다. 몇 년 전에 이곳을 지나가다 본 나무가 보인다. 그때는 버섯을 기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온몸에 상처 투성이가 되어 하늘을 보며 버티고 있다. 많은 새들이 벌레를 먹으려고 뚫어 놓은 구멍이 수십 개가 넘는다. 그늘을 주고 버섯을 주고 새들까지 먹인 흔적이 나무의 일생을 보여준다.


그 나무 옆에는 또 다른 나무가 반듯하게 누워서 하늘을 본다. 눈으로 온몸을 덮고 누워 있는 모습이 아주 편해 보인다. 나도 그 옆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걷는다. 숲 속의 오솔길은 언제 봐도 정겹다. 그동안 너무 추워서 못 왔는데 오랜만에 오니 더 좋다. 코끝이 시리고 숨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와도 열심히 앞으로 걷는다. 꽁꽁 얼은 계곡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침묵하며 봄을 기다린다. 지난가을에 누군가가 지어 놓았던 나무로 만든 집이 주저앉아 눈이 쌓였다.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지은 집인데 헐고 다시 짓고를 반복한다.


숲에는 숲의 삶이 있어 자세히 보면 재미있다. 올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숲이다. 아주 작은 새 한 마리가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아서 무언가를 찍어 먹는다. 먹을 것이 없어 보이는데 바쁘게 날아다니며 논다. 한쪽에서는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오르내리며 무언가를 찾는다. 추운 날이지만 햇살이 따뜻해서 좋다.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가다 보면 숲과 나는 하나가 된다. 봄이 오면 파릇파릇 나오는 온갖 풀들이 봄을 기다리며 눈을 덮고 있다. 보이지 않게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보면 말로 할 수 없는 희망이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나무로 보이지만 나무는 곧 인간의 생명이다. 나무가 없다면 지구는 멸망한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점점 많아진다. 산불이 나고, 홍수와 가뭄이 많아지고, 토네이도가 와서 휩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연이 훼손되는 것은 큰 불행이다. 아무리 인간이 쌓은 탑이 높다 하더라도 자연이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생물들이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 있기에 가능하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 인간은 순화된다.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계절을 맞고 보내며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다시 희망하게 된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것도 가을이 되면 퇴색하고 겨울을 맞는다. 겨울뒤에 오는 봄을 위해 추위와 싸우며 견디는 시간을 갖는다. 고통은 인내를 주고 인내는 또 소망을 가져다준다. 넓고 낮은 숲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 같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고, 넓고 좁은 길이 있다. 꼬불꼬불한 길을 가다 보면 곧고 평평한 길이 나오는가 하면 낭떠러지가 나타나서 놀라기도 한다. 사람 사는 인생이 고스란히 있는 숲에 오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이 평화롭다. 몇 개 남은 이파리를 가지고 추운 겨울을 나는 나무가 있고 아무것도 없어도 가지를 자신만만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나무도 있다.


지난가을 쓰러지지 못하고 서 있다가 눈에 파묻힌 들꽃들의 마른 장대가 삐죽삐죽 눈밖으로 나와서 안부를 묻는다. 머지않아 새파란 옷을 입고 눈길을 끌 준비를 하는 것 같다. 하늘은 높고 푸르지만 겨울의 자존심인 바람은 여전히 숲을 흔든다. 눈이 쌓인 숲은 고요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듯한 조용한 숲 속에도 삶이 이어진다. 까치와 참새가 날아다니고 다람쥐가 뛰어노는 숲에 있으면 욕심도 이기심도 다 없어진다. 남을 이기려고 할 필요도 없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않아도 원하는 평화를 얻는다.


조금씩 걷다 보니 어느새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숲과 숲 사이에 길을 따라 걸어본다. 나무들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어 쌓인 눈이 조금씩 녹아가면 봄이 올 것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서 계절은 저마다 할 일을 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자연의 슬기와 지혜를 따르지 못한다. 자연을 따라 살면 자연을 닮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눈과 바람과 구름과 하늘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숲 속의 하루가 간다. 기쁨과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희망이 있는 우리네 인생도 덩달아 춤을 춘다.


(사진:이종숙)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