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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로... 나는 행복하다

by Chong Sook Lee


어디서 왔는지 이름모를 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사진:이종숙)


빼앗긴 들에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전염병으로 인하여 불과 몇 달 동안 일상을 빼앗겼는데 이토록 불편하고 힘드는데 일제 강점기 36년의 기간은 숨이 막히고, 가슴이 타고, 그야말로 체념과 분노가 었을 것이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새로운 일상에 길들여져 가지만 조금씩 완화되어 가는 모습에 희망이 생긴다. 큰 아들 네가 주말에 집에 와서 2주간 있다가 간다는 연락이 왔다. 오고 가는 사람이 없으니 청소도 안 하고 살았는데 이제 청소도 하고, 머리에 염색도 하며 그동안의 원초적인 삶을 정리해야겠다. 이것저것 밑반찬도 준비하고, 국거리도 사다 놓아야 하는데 새삼스레 마음이 바빠져 정신이 없으면서도 왠지 신이 난다. 하루하루 밥이나 해 먹고 놀기만 하며 지냈는데 손주들이 오면 집안이 들썩들썩할 것이다.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 하루 하나씩 정리해 보려 한다.


남편과 둘이 살면 아무래도 삶이 단순하다. 어지럽히지 않으니 특별히 정리할 것도, 청소할 것도 없지만 아이들이 오랜만에 오면 나름대로 바빠진다. 애들은 애들대로 집에 오랜만에 왔으니 쉬고 싶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오랜만에 멀리 떨어져 살던 애들이 왔으니 해주고 싶은 것이 많다. 무리를 하지 않아야 하지만 이것저것 참견하고 해주다 보면 애들이 집에 갈 때쯤 에는 몸이 만신창이 된다. 손주들이 이뻐서 쫓아다니고 삼시세끼 참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다 큰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제 살림이 아니니 하나부터 열까지 쫓아다니며 시중을 들어줘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예전에 인생 선배들이 "애들이 오면 반갑고, 애들이 가면 더 반갑다". 고 하던 말이 이해가 간다. 몇십 년을 함께 살던 애들이지만 떨어져 따로 살다가 이렇게 오랜만에 오면 새삼스럽다. 옛날에 부모님은 어찌 사셨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셨다. 내 위로 오빠가 있고 내 아래로 4명의 동생이 있었다. 몇 년 전에 남동생이 세상을 떠나 지금은 다섯만 남았지만 여러 가지로 부족하던 옛날에 8 식구를 부양하시며 사셨던 부모님이 정말 존경스럽다. 요즘처럼 사는 것이 편리한 생활도 스트레스가 많은데 살면 다 살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 옛날 사람들 생각하면 불쌍하고 가엾다. 없는 가운데에서 평생을 희생 속에 자식들만을 위해 살아가신 부모님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가정의 달인 5월이 가는 오늘 가만히 생각해 본다. 부모님에게 받은 숭고한 사랑을 하나도 갚지 못한 채 살아간다. 아파도, 슬퍼도 내색 한번 못하고 사람의 도리를 해야 하기에 죽도록 열심히 살으신 분들이다. 자신은 없고 자손들만 생각하며 사셨다.



민들레가 제철을 맞았다.(사진:이종숙)




우리 부모님 뿐만 아니고 세상의 어떤 부모님도 같을 것이다. 역사상 인간으로 태어나서 대접 한번 못 받고 살다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 많아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살다 간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자식 하나하나가 성격도, 생김새도, 취향도 다른데 다 맞춰 주며 육 남매를 사랑으로 키우신 부모님은 하느님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이나 다름없다. 내 나이에 상상도 못 하는 유치원을 다니며 온통 사랑만 받으며 살았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선생님 무릎에만 앉아서 귀염을 받았다. 잘살고 부유했기에 그럴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시고 엄마의 병환으로 가난이 선물로 들어앉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우리들이 그저 뗄 수 없는 혹 같았을 텐데 부모님은 소리 한번 안 지르며 매 한번 들지 않고 우리를 기르셨다.


딱 한번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가 다니는 성당에 가서 여러 가지 성탄절 연극 구경을 하고 집에 갔어야 했는데 성당에서 끓여준 떡국을 먹은 것이 탈이었다. 저녁 내내 나를 찾아다니시던 부모님 께서 집에 온 나를 야단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렇게 사랑만 받다 결혼하고 결혼 2년 만에 이민을 온 뒤 어쩌다 한국을 방문하여 부모님과 며칠간 같이 있을 때도 부모님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실 생각은 하지 못했다. 누구나 정해진 일상대로 살아가고 나이가 들수록 단순하고 똑같은 일상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 만난다고 돌아다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며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오랜만에 가서 친구도 보고, 좋은 곳에 구경 다니다 보면 엄마 아버지는 그들의 하루 종일 일상을 뺏긴 채 나를 기다리며 집에 계셨다.


이제와 생각하니 말씀은 안 하셨지만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참으로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부모님을 뵈러 간 것이라 하지만 나를 위한 여행을 한 것이다. 내가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한테 응석을 부리러 간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집에 온다고 하면 좋기야 엄청 좋지만 힘들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왔을 때 내가 편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를 한다. 안 그러면 귀여운 손주들과 놀지도 못한 채 그냥 보내야 한다. 하루에 조금씩 청소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놓으면 애들도 좋아하고 나 역시 편하다. 식구가 많으니 가짓수보다도 맛있는 음식 몇 개에 국이나 끓여 먹으면 된다. 여러 가지 하려면 힘도 들고 복잡해진다. 식당을 했기 때문에 음식 하는 것은 손에 익었지만 그것도 세월이 갔으니 예전 같지 않다.


한국 사람들은 먹는 것에 비중을 많이 두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손님으로 오는 것이 아니니 부담스럽지도 않고 편안하게 해야 한다. 옛날 같지 않고 요즘 애들은 우리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니 그냥 집에 와서 편하게 쉬고 가게 하면 된다. 이제 아이들도 결혼한 지 오래되었고 각자 식성에 맞게, 입맛에 맞게 잘해 먹는다. 이번에 오면 나는 손주들 하고만 놀고 싶은데 그게 될까 모르겠다. 보나 마나 식구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을 텐데 앞으로 기회를 봐서 서서히 아이들한테 바통을 넘겨줄 때가 있으리라. 그래도 집에 와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볼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더 나이가 들고 손주들도 자라고 아이들도 나처럼 철이 들면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지금까지는 우리도 아직 기운이 있고 어린것들 챙기느라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다.


전염병으로 만나지 못하면서 때때로 보고 싶은 마음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는데 이제 조금씩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정부 방침이니 조심하며 잃었던 일상을 되찾는 연습을 해야겠다.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에 가벼운 흥분이 된다. 오랜만에 못 만났던 손주들을 가슴에 꼭 껴안아주고 싶다. 가는 세월 속에 아이들도 나이 들어가고 손주들도 자란다. 모르는 땅에 와서 씨를 뿌린 우리는 이렇게 열매를 맺고 익어간다. 어느 날 바람처럼 떠난다 해도, 희미한 기억으로 묻힌다 해도 오늘의 나로 나는 행복하다.


사과꽃이 예쁘게 폈다.(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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