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태어난 손자가 4살이 되는 생일날이다. 그해는 6월 10일이 금요일이었다. 매주 금요일은 만둣국을 만드는 날이었는데 그날도 부리나케 뼈국물을 끓이며 손님을 받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전날부터 허리가 아프고 배가 살살 아프다던 큰 며느리가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가고 있다고 한다. 첫아기이니 시간이 많이 걸리리라 생각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고 남편은 그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도매상에 급히 갔다 온다며 식당을 나갔다.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분주하게 준비를 하는데 병원에 도착한 사부인한테 아기를 낳았다는 메시지가 왔다. 병원에 도착한 지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손주를 낳았단다. 남편도 연락을 받고 장을 보다 말고 부리나케 식당으로 돌아왔다.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그전주에 애 낳기 전에 맛있는 것이라도 사주고 싶어서 캘거리에 내려가 며느리 배를 보니 많아 내려와 있었지만 예정일이 3주가 더 남아있어 아직 멀은 상태라서 걱정 말라며 안심하라고 했다.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이고 기분 좋게 집으로 왔었다. 2주일은 더 남았기에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아기가 나왔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나온 아기였기에 내심 기다렸다. 공부하고 학교 다니며 바쁘다는 이유로 아기를 낳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손주를 낳았다고 연락이 왔다. 이제 만둣국이고 뭐고 생각할 것 없이 가봐야 했다. 이것저것 준비하고 식당 문에 '개인 사정으로 문을 닫는다'라고 써 놓고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손주가 태어나서 문을 닫고 새로 태어난 손자를 보러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아들 며느리가 사는 곳으로 출발했다. 손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바쁘지만 즐겁다.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기분 좋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3시간 만에 병원에 도착하여 보고 싶고 궁금하던 손자와 첫 대면을 했다. 새록새록 잠을 자며 눈을 깜빡거리고 꿈틀대는 모습이 신기하고 감사했다. 배냇짓을 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자는 모습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았다. 40년 전 내가 큰아들을 낳았을 때가 생각났다. 세상에 없던 생명이 태어나고 있던 사람이 떠나가는 진리를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봄이 오고 여름과 가을이 왔다가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는 자연의 이치를 알았지만 인간의 이치를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 없었다. 바로 다음날 친정아버지께서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인간이 떠나며 못다 한 생을 누군가를 통해 또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저 새로 세상에 태어난 손자와의 만남에 마냥 행복해했다. 손자를 낳느라고 애쓴 며느리가 아기를 낳고 배가 고파서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싱싱한 회였다. 임신 중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9개월 동안 먹지 못했던 생선회였다. 당장에 일본 식당에서 회 모둠을 사다 주니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난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하늘도 땅도 우리 사랑하는 손자가 세상 구경 온 것을 환영했다. 작은 손을 잡아보았다. 평화롭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기원했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배우고 힘든 일을 이겨 내고 아픔을 극복하며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갈 것을 간절히 바라며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생명이 무엇 이길래 생전 처음 보는 손자는 언제나 보았던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유전자는 참으로 훌륭했다. 부모의 모습을 닮고 조상 누군가의 모습이 태어난 손자의 모습에 보였다. 새록새록 자는 모습을 눈에 담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새털같이 가벼워 날아갈 듯 기분이 좋다. 사람의 마음은 순간순간 바뀐다. 며칠 전에는 잘 낳겠지 생각하고, 아침에 병원에 간다고 할 때는 두려움으로 불안해했다.
그러길 얼마 안 돼서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고, 준비를 하며 기대에 흥분하고 가서 손자를 만나고, 기쁜 마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냥 행복했다. 어느새 밤이 되어 갔다. 손자가 태어나고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덕담을 해주고 아들이 태어났을 때를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됐다. 여름이기 때문에 7시가 넘었는데도 훤했다. 3시간을 운전해야 하는데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았다. 인생이란 살아갈수록 모르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정답이 없기에 계산대로,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한없이 달려가는 것이다. 알다가도 모르고, 전혀 모를 것 같다가도 알듯한 인생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안개가 걷혀 걸어가고 환하던 길이 갑자기 어두워지기도 한다.
실망과 희망의 굴레를 돌고 돌며 하루를 살아간다.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기도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작은 행복을 찾아가며 기쁨을 만난다. 죽을 듯하던 순간도 어쩌다 만난 따스한 바람 안에 다 녹아버리고 다시 태어난다. 인생의 롤러코스트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무섭고 두렵게, 가슴 떨며 흥분 속에 걸어간다. 삶은 지은이의 손길로 지켜지고 이어진다. 볼 수 없고, 들리지 않지만 조상 대대로, 자손 대대로 그 위대한 창조주의 손길에 의해 이어진다. 우리가 만나는 순간들이 때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기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망각이라는 선물로 고통을 잊으며 새로운 날들을 희망하며 살아간다.
금요일 밤의 고속도로는 한가했다. 사람들은 금요일 하루 더 휴가를 내고 주말에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간다. 목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아침에 떠나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은 한가하고 조용하다. 앞뒤로 몇몇 차가 오고 갈 뿐 아주 한적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집을 향했다.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열 시 반이었고 서울에 사시는 친정 부모님께 전화를 드릴까 말까 하다 너무 시간이 늦어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은 식당에 아침부터 손님들이 밀려오기 때문에 아침 일찍 가서 할 일이 많다. 끊임없이 줄줄이 들어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서는 완벽한 준비가 필수다. 그러기에 금요일 밤에는 토요일 아침에 피곤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야 하기에 늦은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토요일 아침 급히 나가는 길에 한국에서 전화가 와 있음을 알았지만 식당 문을 열고 커피를 내리고 베이컨과 감자를 한판씩 구운 다음에 전화를 했다. 동생이 울고 오빠가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전해오고 나는 충격을 받고 통곡하며 전화를 끊었다. 오늘을 준비한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한국에 가야 했다. 전날 나는 엄청 기뻤다. 그러나 다음날 나는 너무 슬펐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손자는 태어났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한 생명은 또 다른 한 생명으로 이어지고 세상은 돌아간다. 장사가 바쁜 날을 위해 한 완벽한 준비는 수포로 돌아가고 나는 급하게 보통 때보다 3배나 더 비싼 비행기표를 구해 한국을 향했다.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한 발걸음이 바빴다.
눈물과 두려움이 앞을 가려 공항으로 가는 길이 멀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나를 보고 계실 것으로 믿는다. 육체를 떠난 영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머문다. 내가 가는 길을 이끌어 주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고 나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라 믿었다. 하늘은 무심하게 맑고 바람 한 점 없고 돌던 대로 세상은 멈추지 않고 돌아가던 4년 전의 일이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