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책길을 걸어본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먹고 하느라 집안에서 빙빙 돌며 살았다. 꿈같은 시간이 지나고 2주 만에 온 숲은 녹음이 짙고 나뭇잎으로 꽉 차서 전혀 숲 속이 안 보인다. 산책길은 한가하다. 몇 명이 말없이 지나가며 서로를 피하며 걷는다. 숲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마스크를 안 쓰고 거리두기만 한다. 여러 가지 식물들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못 보던 꽃들이 많고 크게 자라서 물가에 가려면 모기떼를 만나야 한다. 물과 풀이 많아서 인지 모기가 많고 살이 올라 통통하다. 손으로, 모자로 모기를 쫓아 보지만 여간해서는 도망가지도 않는다. 귀 옆에 바짝 다가와 웽웽 거리며 속삭인다. 눈에도, 머리에도 그냥 달라붙어 피를 노린다. 안경 안으로 들어오고 옷 위에서도 깨문다.
며칠 동안 온 비로 물이 많이 불어나고, 풀들은 신나서 자라니 모기 생식에 좋은 조건이다. 초록이 좋아 나왔는데 버드나무 종류의 나무들이 허물을 벗는지 하얀 솜털 같은 것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닌다. 눈이 오는 것처럼 바람도 불지 않는 산책길을 하얗게 덮었다. 모기 쫓기도 바쁜데 하연 솜털까지 날아다니니 눈을 뜰 수가 없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걸어본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짧은 여름에 이것저것 빼고 나면 정말 남는 게 없다. 비 오고, 바람 불고, 하얀 솜털 날아다니고, 춥고, 모기 피해 다니다 보면 짧은 여름이 지나간다. 이르면 8월 중순에도 눈이 올 수 있는 이곳인데 이렇게 여름을 뺏기면 다시 겨울로 돌아간다. 하지만 겨울은 올 때 오더라도 지금은 생각 말자.
아직 몇 개월이 남았으니 미리 걱정할 필요 없다. 봄 같은 봄도, 여름 같은 여름도 없이 그냥 오고 가지만 꼭 봄이라고 꽃을 피울 이유도 없고, 여름이라고 더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자연이 맞춰 줄 필요가 없다. 자연은 자연의 할 일을 하며 오고 가는데 인간들은 자연을 통제하려 한다. 겨울이 싫다고 해도 겨울은 오고, 꽃피는 봄이 가지 않기를 원해도 봄은 간다. 하늘은 너무나 높고 푸르다. 바람도 한점 없이 평화로운데 하얀 솜털이 앞을 가로막고 방해를 한다.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들은 완벽하기를 바라지만 결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물소리가 졸졸졸 평화롭게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듣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 가까이에 가려면 풀숲을 지나가야 한다.
조용히 잠자고 있는 모기들은 자기네들 지역에 침입자가 들어오니 자다가 말고 깜짝 놀라서 침입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물어뜯고, 피를 빨아먹고, 나중에 후유증까지 남겨 놓는다. 그렇게 당하지 않으려면 그냥 조용히 살게 놔둬야 하는데 사람들이 귀찮게 구니 공격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도 그냥 있으면 괜찮은데 와서 찝쩍거리고 귀찮게 굴면 신경질 나는 것처럼 모기도 그냥 놔두면 안 덤빈다. 산책을 하면 보이는 것이 많아 평소에 그냥 넘겼던 작고 소소한 것들도 떠올리게 된다. 걷다 보니 민들레꽃이 다 지고 홀씨만 안고 꽃처럼 서있는 곳이 보인다. 숲 속에 자라는 민들레와 토끼풀은 내 무릎까지 크게 자란다. 아마도 숲 속에서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맘껏 자라 크게 자랄 수 있나 보다.
Alberta rose(사진:이종숙)
어쩌면 인간도 스트레스가 없으면 또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스트레스가 사망의 요인이 된다는 말은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스트레스로 인하여 생기는 우울증을 비롯한 현대병은 치료제도, 약도 없는데 사람들을 이렇게 평화로운 숲 속을 걷게 하면 치유가 될듯하다. 다리를 건너며 강이 흐르는 곳을 바라본다. 나무들이 쓰러져 누워있고 그 옆에는 작은 풀들이 자라며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다. 물과 햇빛과 산소를 얻어 마시며 또 다른 생명이 탄생하며 살아간다. 오묘한 숲의 모습은 언제나 새롭다. 몇 번을 다녀간 곳이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처음 온 길인가 보면 왔던 길인데 시시때때로 변하는 숲은 올 때와 갈 때가 달라서 싫증이 안 난다. 평지를 걷다 보면 어느새 오르막길로 들어서 숨을 몰아 쉬다 보면 다시 평지가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며 땅을 내려다보면 길은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삶의 모습을 닮았다. 힘들다 생각될 때 평지가 보이고 편하다 생각하면 내리막길이 보인다. 오르고 내려가다 보면 다시 힘든 길이 보인다. 이제 도저히 안될 것 같은 마음에 쓰러지면 다시 파란 평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이니 일어서서 앞으로 가게 된다. 계곡을 향해 층계가 있다. 한참을 내려가니 깊은 계곡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날아다니면서 시야를 가리던 하얀 꽃가루가 여기는 하나도 없다. 아까 날리던 꽃가루가 싫어서 집으로 갔다면 이곳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모기도 없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냥 있고 싶지만 앞으로 간다. 취나물이 엄청 많다. 먼저 번 왔을 때 알았던 곳인데 들어가는 길을 찾아도 길이 없다.
그냥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아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이 좋다. 옹기종기 모여서 새파랗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내가 뜯어서 먹어도 좋겠지만 그냥 보는 것만도 좋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만 아는 곳에 무언가가 자라는 것을 보며 약간의 기분 좋은 흥분을 느낀다. 숲은 어쩌면 그런 알 수 없는 미지의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살아남는지도 모른다. 인생과 삶이 있는 모습에 함께 공존한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고 저마다의 모습을 자랑하며 산다. 질투도 시기도 하지 않는 숲이 좋아 찾으며 치유한다. 힘든 삶도, 아픈 삶도 추억이 되고 겨울 속에 있는 봄을 그리며 산다. 어제가 있어 오늘이 있듯이, 오늘이 있어 내일도 온다. 진초록의 여름은 이토록 가슴을 뛰게 한다. 많은 것들이 살아 영원을 꿈꾼다.
뉴스로 보는 세상을 잠시 잊고 숲 속을 찾으니 세상은 천국과 지옥이 함께 하고 꿈과 생시가 함께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가는 길은 아까 오며 걸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처럼 보인다. 마치도 꿈꾸어왔던 어느날의 내 모습이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다. 아까 보지 못했던 예쁜 꽃이 나에게 인사한다. 갈 때는 뭐가 그리 설레고, 바쁜지 자세히 보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돌아오는 길은 더 아름답다. 젊었을 때는 사느라 바빠 앞 만 보고 살아가며 못 보았던 것들을 퇴직하고 나이 들어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기는 것과 같이 숲 속에도 우리네 삶이 있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을 지나 아까 내려왔던 계단을 올라가며 중간에 서서 흐르는 계곡을 내려다본다. 마치 지나온 인생처럼 아름답다. 꿈같은 인생이다.
앞으로 얼마를 꿈속에서 살아갈지 모르지만 인생은 사는 만큼 꿈을 꾸며 사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꿈에서 깨어난다. 꿈을 깨기 전에 꿈속에서 즐겨야 한다. 멋진 곳에 가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 꿈이냐고 묻는다. 살아온 게 꿈같은 것이 아니고 꿈처럼 기쁘고 행복하게 산 것이다. 비록 우리의 삶이 때때로 힘겹기도 하지만 지나고 보면 다 아름답지 않은가? 생시는 또 다른 꿈이라 생각하면 된다. 아침에 꿈을 깨어 실망하고 절망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희망의 꿈을 꾼다. 모기떼와 시야를 가리던 하얀 꽃가루는 잠깐 스쳐가는 악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