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알던 일들을 못하게 되고 알던 사람을 못 알아본다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해야 할 것을 잊어버린다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을 잊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를 잊어버린다 해야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금방 생각했던 것도 그 옛날의 일도 까마득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한다 기억이 나지 않고 생각도 안 나고 방법을 알려고 하지 않고 몇 마디의 이야기만을 번복하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병 잊혀가는 기억을
잡으려 하지 않고
알았던 것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가지고 있던 것도
잃어버린 것도 모르며
아이가 되어 산다.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이
눈을 뜨고 움직이고
눈을 감고 잠을 자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본다
해를 닮은 양귀비가 세상을 본다.(사진:이종숙)
기뻐서도 행복해서도 아니다 괴로워도 고통스러워도 살아가는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밤이 되고 새벽이 와도 붙어있는 생명 때문에 살아간다 가고 싶은 곳도 못 가고 보고 싶은 사람도 못 보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하며 살 이유가 없는데도 살아가는 이유는 죽지 않았기 깨문이다 삶의 목표도 의미도 없고 미련도 희망도 없는데 여전히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유는 마음대로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기억도 추억도 없고 욕망도 없는데도
여전히 살아가는 이유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올 때도 알 수 없이 왔듯이 갈 때도 알 수 없는 것 한평생 해 놓은 것도 없고 남은 생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여전히 살아가는 이유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석양이 서쪽하늘에 물들이고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