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든 것처럼 조용한 새벽에 여명이 밝아온다. 밤새 숨어있던 태양은 곱게 타오르며 세상을 밝힌다. 잠자던 모든 생명들은 눈부신 태양의 빛으로 기지개를 켜고 꿈틀거리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받고 하루를 살아갈 준비를 한다. 담장에 앉아서 사랑놀이에 바쁜 까치들이 얼굴을 보며 부리를 맞대 고 입맞춤을 한다.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표현이 귀엽다. 매일 한차례씩 쏟아붓는 소나기로 세상의 먼지를 다 씻은 듯 세상은 윤이 나도록 생생하다. 여름은 조용한 가운데 떠날 채비를 하며 성질 급한 가을은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을 불어 댄다. 뜨겁던 날들은 어디로 가고 군데군데 단풍이든 나뭇잎들도 눈에 보인다. 한 것도 없이 세월만 보내 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따져보면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큰일을 하고 사는 것이다.
먹고 자고 놀며 보내는 시간이 시시한 것 같아도 기운이 없고, 하고 싶은 의욕이 없으면 하루도 긴 시간일 것이다. 하는 일 없이 살아도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 너무 빨리 간 것 같아 허무할 때가 한두 번 이 아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백 년을 살 것을 상상도 못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백 살을 넘기면서 건강하게 산다. 언제가 가는 시간 일지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짧은 세월들인데 하루라는 시간을 대충 살고 있다. 둘째가 결혼하여 호주에서 살며 낳은 손자가 이제 곧 10살이 된다. 4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무엇을 하며 그 10년이 지났는지 생각도 안 난다. 그저 하루하루 살다 보니 지금의 나를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며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껏 살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살아왔 는데 앞으로 그 희생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날이 육신은 늙어가고 정신도 희미해진다. 남의 일 같던 일들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서고 나는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며 받아들인다. 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양보하듯이 나는 조금씩 내 자리를 내어준다. 인생은 연습 없는 실전이지만 어쩌면 마음을 비우는 것은 연습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게 있는 10년이라는 세월도 지나간 10년처럼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아이들은 중년의 나이가 될 것이고 손주들은 청소년기를 맞을 것이다. 지금은 매사를 참견하며 어린 손주들을 쫓아다녀야 하지만 그때가 되면 손주들이 우리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고 아이가 되어 간다. 어느 날 없던 아이들이 세상에 오듯 세상에서 살던 나는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희미해질 것이다. 살면서 인생이 고행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고 원하는 것도 많았는데 허락하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사진:이종숙)
삶이 힘들고 괴롭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다가는 것이 슬프고 화가 났다. 꿈이 컸는지 아니면 욕심이 많았는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조금씩 눈과 귀가 열리며 생각은 또 다른 곳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 싫던 날들은 기쁨이 되고 슬프던 날들은 환희로 가득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상황이 달라진 것도 없었다. 단지 나의 생각을 바꾸니 세상은 아름다웠다. 여행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더없이 소중했다. 어제의 아픔은 추억 이 되었고 오늘은 내일을 향한 희망으로 행복했다. 살면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두려우면서도 설렌다. 모르는 곳에 가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며 생활한다. 실망도 하고 절망도 하고 길을 잃고 방황도 하며 집으로 가고 싶어 향수에 젓기도 한다. 외로움에 지쳐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
그저 하루하루 잘 버티고 견디며 살다 보면 집으로 갈 시간이 온다고 생각하면 얼마만큼의 고통은 지나간다. 삶은 이렇게 하나의 여행이거늘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과 비벼대며 살아간다. 영원한 것은 없음을 알면서도 천년만년 살듯이 욕심내고 살아간다. 뜰 앞의 나뭇잎을 바라본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고 멈추고 다시 흔들린다. 하늘의 구름은 흘러가고 모였다 다시 흩어지고 자취를 감춘다. 세상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움직인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잡아당겨서도 끌어서도 아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돌고 돌며 흔들리고 돌아간다. 하고자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뿐 보이지 않음 속에 이루어지고 이끌려간다. 흐르는 강물이 바다의 길을 알아 찾아가듯이 자연의 순환으로 이어진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순간순간이 다르다. 이륙한 지 몇 초 만에 떨어진 비행기로 수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 무섭다.
화재로, 물난리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전염병으로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사이다. 사상의 차이로, 정치적 수단으로 인간의 생명을 악용하는 세상이다. 악이 선을 이기고 거짓이 진실을 흉내 내는 시대이지만 선과 진실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못살겠다는 세상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여전히 사람들은 사랑을 하며 웃고 살아간다. 삶은 여행 속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여정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많고 적고, 높고 낮고 결국엔 우리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간다. 싫어도 좋아도 우리가 여행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두 손 활짝 피고 잘살았다며 웃으면 되는 것이다. 여행길에서 우리는 겸손해지고 너그러워진다. 서로에게 감사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작은 일에 기뻐하고 순간을 살아가며 고행으로 생각한 인생길은 즐거운 여행이 된다.
아침내내 사랑을 나누며 담장을 옮겨다니던 까치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바람은 잔잔하다. 어제의 폭풍우는 어디로 갔는지 예쁜 무지개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맑게 개인 하늘엔 뭉게구름이 평화롭다. 언제올지 모르는 비바람을 생각한다면 하루 한시간도 살지 못한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갑자기 맑은 해를 안고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인생은 흘러간다. 내가 있어 인생이 행복하고 인생이 있어 우리는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