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부르는 소리를 따라 걸어간다. 날씨가 좋아서 인지 산책하러 온 사람들로 주차장이 꽉 차서 조금 멀리 주차를 하고 걸어간다. 주차장 근처에 오래된 집이 하나 있었는데 허물고 새로 지으려고 집이 있던 자리를 깊게 파 놓았다. 적어도 지은 지가 80년이 넘은듯한 집이 었는데 한동안 폐가처럼 아무도 살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집 위치는 정말 좋다. 앞에 넓은 들판이 있고 계곡으로 내려가는 산책길로 연결되어 계절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새로운 주인이 멋진 집을 지을 것을 기대하며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어젯밤에 비바람을 동반한 무서운 비로 풀들이 다 드러누워 있다. 햇살은 눈부시게 나무 사이로 산책길을 비추니 숲 속은 어느새 황홀하게 빛난다. 숲이 우거져 여름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썰렁하다. 모기 때문에 긴 옷을 입고 왔는데 안 그랬으면 추울 뻔했다.
어제 갔던 곳에는 모기가 너무 많아 오늘 이곳에 왔는데 이곳은 모기가 거의 없다. 완전히 숲 한가운데에 넓은 산책길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다. 지난번 공사관계로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산책길 초입은 괜찮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고 계곡에는 물이 힘차게 흐른다. 어제 온 비가 이곳을 지나 강으로 가던 물이 넘쳤던 자국이 여기저기 보인다. 비바람으로 넘어지거나 뿌리까지 뽑혀 숲 속에 누워 있다. 자연이 하는 일은 인간이 전혀 알 수가 없다. 짧은 시간에 쏟아진 강한 비에 굵은 나무들이 힘 없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 자연의 힘이 무섭다. 걷다 보니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 옆길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산책길이 없어지고 물이 넘쳐 계곡과 연결되어 버렸다. 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하늘은 파랗고 높아 가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오고 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고, 개를 데리고 걷거나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즐긴다. 숲 속의 길이 아닌 숲과 숲으로 이어진 길이지만 물소리가 들리고 나무들이 많아 숲 속과 다름없다. 한참을 걸어가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내려가 본다. 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콸콸 내려간다. 물 가까이에 있는 나무들은 벌써 단풍이 들어 있는 모습을 보며 세월의 빠름을 느낀다. 숲 속의 오솔길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올라 가보니 커다란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노란 들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피어있다. 봄부터 피고 지며 씨를 뿌리는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한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예쁘다고 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며 한 철을 살다가는 시시한 꽃들이지만 그들은 제 할 일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는다.
자른 나무에서 나무가 자란다.(사진:이종숙)
길을 따라 걷는다. 뒤에서 자전거가 지나간다는 신호를 보내 면 옆으로 섰다 가고 급히 뛰어가는 사람들을 먼저 보낸다. 먼저 보내고 나중 가고, 급한 사람 사정을 봐주며, 서로 대접하고 존중하며 산책길에서 하는 대로 살면 참 좋을 것 같다. 바람이 시원하게 분다. 그 바람을 따라 가면 어디로 갈까 영혼은 어느새 바람을 따라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자연과 더불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 고 힘없는 나뭇잎들은 빙그레 한 바퀴 돌며 땅에 떨어진다. 사람도 어느 날 힘이 다하고 쇠진하는 날 저 나뭇잎처럼 힘없이 떨어질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좋은 날을 기원한다. 숲 속에 오니 숲을 닮아 마음이 넓어지는지 사람들은 모두 여유롭고 너그럽다. 가다 보니 의자가 있어 잠깐 앉아 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들어온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그 많은 나뭇가지를 헤치고 밝힌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자신을 알리며 살아간다. 시시하게 보이는 풀포기 하나도 저 나름대로 세상에 알리고 사라져 간다. 인간도, 생물도 지은이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때가 되면 생을 마친다. 이렇게 숲 속에 와서 보니 인간의 삶이나 숲 속의 삶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세상에 태어나 하루만 살고 가는 하루살이나 몇백 년을 사는 나무들도 언젠가는 떠나는 것처럼 길어야 백 년도 못 살고 사는 사람이나 똑같은 삶이다. 길이 막혀 다시 다른 길로 돌아서 가본다. 침수로 피해가 많이 생겼는지 이곳저곳에 출입금지 표시가 있다. 숲 속에 길이 막혀 돌아가며 인생길도 이렇게 막혀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든지 길을 찾으면 길이 나온다. 가고자 했던 길은 아니지만 약간 돌아가도 목적지에 갈 수 있다.
들꽃이 여름을 보낸다.(사진:이종숙)
다른 길도 나름대로 좋았다. 물을 끼고 돌아가니 멋있는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약 이 길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멋있는 경치를 놓쳤을 것이다. 돌아가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길을 가보니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어 굳이 다니던 길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숲 속은 나무와 풀과 꽃들이 있고 물이 여기저기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서로 만나게 된다. 오히려 길이 막혀 다른 길로 온 덕분에 더 많이 구경을 했다. 사람 사는 것도 장애물이나 실패 덕분에 얻어지는 것들도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들판엔 노란 들꽃들이 예쁘게 자란다. 모기가 무서워서 집에만 있었다면 오늘의 숲을 알지 못한 채 그냥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이 가기 전에 더 많이 발품을 팔며 돌아다녀야겠다. 겨울에 그토록 기다리던 여름이 아니던가?
어느새 잔디는 성장을 멈춘 듯 서걱거리고 뜨겁던 햇빛도 따뜻하다. 산책길은 다시 조용하고 들꽃들도 힘없이 흔들리며 심심한 고추잠자리는 바쁜 척하며 허공을 날아다닌다. 여름은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내년을 기약한다. 막상 여름이 갈 것 같이 선선한 바람이 부니 벌써부터 하루가 아쉽다. 며칠 전만 해도 '더워 더워' 했는데 머지않아 '추워 추워'를 해야 한다. 자연은 이렇게 나를 부르고 세상을 구경시켜 준다. 세상은 와서 구경하라고 유혹하지만 집 가까이에 있는 조촐한 숲을 걸으며 사는 것도 참 좋다. 겨울을 기다리지도 말고 여름을 그리워하지도 말고 오는 계절을 맞으며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오늘도 산책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