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이 피어나듯... 나의 하루도 피어난다

by Chong Sook Lee


호바꽃이 노랗게 피어나는 날(사진:이종숙)



꿈도 꾸지 않고 실컷 잘 자고 나니 하늘이 깜깜하다. 당장에 쏟아질 것처럼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올 것 같다. 어제 올 비가 오늘 오나 보다. 어제는 영상 30도의 뜨거운 날이었다. 시원한 여름옷을 입고 산책을 다녀왔는데 너무 더워서 열무김치에 국수를 말아먹고 뒤뜰에 나와 하늘을 보았더니 새털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오후에 한차례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는 맞지 않아 비는 오지 않았는데 그 비가 지금 온다. 계속 쏟아지는 비는 순식간이 세상을 다 적셔 버려 좋았던 어제의 모습을 감춰버렸다.

나무도 꽃도 비에 젖어 추운 듯 웅크리고 서있다. 어제 30도가 지금은 13도로 내려와서 썰렁하다 못해 춥다. 앞뜰에 화사하게 피었던 노란 들꽃이 고개를 숙이며 지고 있다. 생명이 다해가는 모습이다. 어느새 입추가 되어 자연이 이별을 준비한다. 계절은 붙잡을 수도, 잡아당길 수도 없이 정확하다. 봄을 기다리다 지칠 무렵에 봄이 잠시 다녀가며 여름을 주고 간다 오랜 기다림이 허무할 정도로 봄이 짧아도 화사한 여름이 빠져 봄이 다녀 간지도 모르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제 여름이 떠나가려고 짐을 싸고 있는데 우리는 보내기 싫어도 보내야 한다. 비가 와도 바깥 식구들이 밤새 잘 있었나 궁금해서 뜰에 나가서 한 바퀴 돌아본다.



아침에 살짝 피었다 입을 다물고 오므리는 호박꽃이 해가 없어서 그런지 활짝 피었다. 샛노란 호박꽃이 널따란 호박잎 옆으로 얼굴을 내밀고 환하게 웃고 있다. 참 예쁘다. 누가 '호박꽃도 꽃이냐?'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호박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찍어본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예쁘고 색깔마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다. 나는 찐 호박을 좋아한다. 색도 예쁘고 호박죽을 만들어 먹으면 없던 기운이 생기는 것 같아 자주 해 먹는다. 매번 호박을 사서 먹고 호박씨를 말려 밭에 심어 보지만 손가락만큼 자라다 말았는데 올해는 아직 호박은 없지만 이파리도 크고 줄기가 쭉 쭉 잘 뻗어 나간다.

호박꽃도 여러 송이 피었고 봉우리도 계속 나오는 것이 보인다. 호박이 열리면 좋겠지만 꽃만 보아도 좋다. 상추도, 쑥갓도 성장을 멈추어 밭이 허전한데 파란 호박잎이 밭을 덮으며 노란 꽃까지 피워주니 밭이 풍성하다. 몇 년 전 동네 할머니가 밭에서 키운 호박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웠냐고 물었더니 호박씨를 긁어서 밭에 버린 것밖에 없다고 하며 자기는 한일이 없는데 호박이 나와 이렇게 자랐다고 이야기해서 너무나 신기했다. 씨를 뿌리고, 만져주고, 들여다보고, 잡초를 뽑아 주며 정성을 다해도 자라지 않는데 그 할머니 밭은 특별한가 보다 생각이 들었다.


호박 넝쿨이 사과나무를 타고 올라간다.(사진:이종숙)

그 뒤 몇 번 나도 호박을 사 오면 호박씨를 밭에 그냥 뿌려 보았지만 호박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올해는 호박씨를 말려서 조그만 화분에 넣고 흙을 덮어놓고 물도 자주 안 주었는데 어느 날 보니 호박 모종이 화분에 소복하게 올라와 있었다. 깜짝 놀라서 남편이 여기저기 옮겨 심어 놓았는데 사과나무 아래에 심어놓은 몇 개의 호박이 쑥쑥 자라서 꽃까지 피었다. 그야말로 할머니 말씀대로 물 준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잘 자란다. 꽃이 피어 들여다보니 다 수꽃이지만 괜찮다. 내가 뭐 한 것이 있어야지 불평을 하고 기대를 할 텐데 여름 내내 물 몇 번 준 것 밖에 없고 호박 혼자 열심히 살아남고 자란 것이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며 꽃을 피우고 줄기를 뻗는다. 사과나무가지를 타고 오르는 호박 줄기는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른다. 해를 향하고, 빛을 향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비가 오고 예쁘게 피어있는 호박꽃이 고마워서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왜 해가 뜨면 꽃을 닫을까? 햇볕이 쬐기 전에 꽃을 오므리면 벌이 어떻게 꿀을 나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밤에 피었다가 해가 뜨면 눈이 부셔서 그런가 보다. 어쨌든 활짝 핀 호박꽃을 보니 비 오는 흐린 날도 내 마음은 행복이 넘친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오늘은 꼼짝없이 집안에서 있어야 한다. 비가 안 오면 가까운 동네 선책이라도 가겠지만 비가 이렇게 오니 오늘은 그동안 밀렸던 드라마나 봐야겠다.



할 일 없는 백수가 되어 산지 8월 말이면 3년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안 나고 세월만 까먹고 산다. 매일이 같은 날 같은데 싫증도 안 내고 잘 살아간다. 몇십 년을 바쁘게 살았으니 쉴 때도 되어 이렇게 빈둥빈둥 사는 것이 이제는 내 삶이 되었다. 뛰라고 하지 않아도 뛰면서 살았는데 지금은 뛰라고 하면 주저앉을 판이다. 천천히 산다. 세상은 어차피 세상이 돌고 싶은 대로 돌아간다. 내가 내 뜻대로 세상을 돌릴 수 없다. 여름이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가을이 오고 싶어서 오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보니 계절이 바뀌었듯이 어느 날 보니 나도 여기에 서있다.


내 자리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나의 자리를 찾아 준다. 해마다 심는 호박씨이지만 올해는 호박씨가 자리를 잡고 버젓이 꽃을 피우고 의젓하게 자라는 것을 보니 좋다.


호박꽃이 피어나듯 나의 하루도 피어난다.
많이 가지면 행복하겠지만 비가 오는데도 활짝 피어있는 호박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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