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도 하다. 냉장고가 비면 불안해야 하는데 마음이 편하다. 마음이 변하면 안 되는데 왜 자꾸 욕심이 없어지는지 모르겠다. 비어 가는 냉장고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게 좋다. 코로나 방역이 강화되어 장을 잔뜩 봐왔는데 시간이 가니 냉장고도 비어 간다. 예전 같으면 장을 보려는 마음이 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텅 빈 냉장고가 너무 좋다. 집안에 살림을 하나라도 더 장만하기 위해 맘에 드는 것을 사다 놓고, 어느 날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사다 쌓아놓았는데 이제 마음이 변했다. 꽉 찬 것보다 어느 정도 비어서 헐렁한 게 좋아진다. 필요 없는 것이 많고 안 쓰는 것도 많다. 이민 생활 40년이 넘었으니 살림살이가 오만가지가 넘는데 막상 쓰려고 하면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것도 많이 있다. 세월 따라 물건도 헌것이 되고 안 쓰고 있던 새 물건도 구식이 되어 버렸다.
평소에 쓰는 물건이 아직도 멀쩡한데 버리고 새것을 쓰지 않고 만일을 대비해서 사다 놓은 것은 세월 따라 늙어버렸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따져보면 수도 없이 많지만 매일매일 쓰는 게 아닌 이상 한 군데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살려면 이것도 돈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여기저기 쑤셔 박아 놓아 두기만 할 뿐 쓸 경우는 거의 없다. 며칠을 장을 보지 않았더니 냉장고가 텅 비어있는데 옛날 같으면 불안해서 장을 보러 당장에 뛰어갔을 텐데 텅 빈 냉장고를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더 좋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게 쌓아놓아야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으니 기분이 좋다. 없는 것 같아도 며칠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새파란 야채는 몇 개 안돼도 밑반찬이 있으니 밥하고 국만 해도 며칠은 끄떡없다.
비워도 되는데, 꽉 차게 채워놓지 않아도 되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냉장고가 작아서 짜증 난다고 했는데 이렇게 비우니 엄청 큰 냉장고였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슈퍼마켓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사다 먹을 수 있는데 굳이 복잡하게 냉장고에 채워 놓지 말아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손님을 끌기 위해 새롭고 싱싱한 물건을 진열해 놓는 슈퍼마켓에서 조금씩 사다 먹으면 된다. 집에 사다 놓으면 신선미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일단 버리는 게 먹는 것보다 더 많이 생긴다. 활동이 적어져서 하루에 두 끼밖에 안 먹는 날이 많아졌는데 옛날 생각만 하고 먹고 싶은 물건을 잔뜩 사다 놓으면 못 먹게 되어 결국 돈을 버리게 된다. 어차피 하루 한 번은 이런저런 이유로 외출을 하는데 틈틈이 오다가다 들려서 한두 개씩 사다 먹으면 된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 옷장에도 수없이 많은 옷이 걸려있다. 새로 산 것을 걸어놓고 먼저 있던 물건은 뒤로 밀어 논다. 옷이나 음식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먹고 입게 되는데 이것저것 쌓아놓다 보면 잊어먹고 못 먹고 못 입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입으려고 사서 가격표도 떼지 않은 옷이 구석에 걸려있는 경우도 있고 언제 사다 놓았는지 냉장고 구석에서 시들어 가는 것도 있다. 살 때는 당장에 입을 듯이 비싼 돈을 들여 사 가지고 와서 걸어놓고 먼저 있던 것을 입다 보면 잊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보니 어제 좋았던 것이 며칠 뒤에는 시들해진다. 냉장고가 빈 것 같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꾸역꾸역 먹을 것이 나온다. 끼니때마다 무엇을 할까 냉장고를 여닫으면 무언가라도 나오는 게 신기하다.
여름에 담가놓은 마늘장아찌도 있고 깻잎도 있다. 냉동고에 김도 있고 얼려놓은 고기와 나물도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찾아보면 먹을 것이 널려있다. 냉장고가 비어서 불안했던 마음은 이제 없어지고 냉장고가 비어 가서 행복하다. 비움으로 얻어지는 여백의 매력을 배운다. 가진 것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허하여 자꾸만 채우고 싶고 쌓고 싶은 마음이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어 가는 냉장고를 보며 행복해지는 내 마음을 보며 어쩌면 우리네 마음도 비울 때 더 행복을 많이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아야 하고, 잘해야 하고, 앞서야 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저 냉장고처럼 조금씩 비워서 더 많은 행복을 담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잔뜩 사다 놓고 버려지는 것처럼 벼락같이 밀려오는 행복이라면 의미를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조금씩 비운 마음에 조금씩 담는 행복 속에 하루를 산다. 비어 가는 냉장고를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냉장고처럼 마음도 비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냉장고도, 우리네 마음도 비어있을 때 그 가치를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