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복잡하다. 시간 있고 할 일 없으니 생각하지 말 것을 생각한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괜한 생각으로 걱정을 만들고 근심을 한다. 이럴 때는 몸을 피곤하게 하는 일로 생각의 꼬리를 잘라야 한다. 집안을 친다든가 음식을 만들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만들면 집중하게 되고 쓸데없는 생각을 끊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도 저도 하기 싫을 때는 그저 요샛말로 멍을 때리는 것도 좋다. 멍 때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지만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열린 커튼으로 보면 세상의 일부분만 보이는 것 같지만 영화처럼 장면이 바뀌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다. 나무가 많은 집에 살다 보니 굳이 숲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볼거리가 많다. 커다란 전나무는 몇 년 전부터 병들어가며 늙어간다.
서로 마주 보며 하늘을 찌를 듯이 정답게 자라던 전나무 하나가 병들어 잘라 버린 후 나머지 하나도 병이 들었다. 병이 들었다고 금방 죽는 것이 아니고 몇 년 동안 시름시름 죽어가는 모습이 마치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과 같다. 아프지만 허리를 똑바로 펴고 서있는 모습은 아직 정정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집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자작나무는 지난여름 심하게 비바람이 불던 밤에 커다란 가지가 잘려 지붕에 누워버렸다. 꺾어진 가지를 잘라냈더니 몇 가지 남지 않은 모습은 숱 없는 머리처럼 이파리 몇 개만 흔들린다. 나무도 나이가 들어 기운도 없고 껍질도 벗겨져서 속살도 보이는 모습이 되어간다. 해마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죽어 가는 가지를 잘라주다 보니 밑동은 나름대로 튼튼 하지만 머지않아 피곤하다고 누워버릴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잎도 열리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데 살 때까지 놓아두려고 하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에 예쁜 등을 달고 동네를 밝혀주기도 하는 나무라서 애지중지 하는데 언제 까지 우리 집을 지켜줄지 모르겠다. 푸른 잎으로 봄을 먼저 알려주고 아름다운 단풍으로 가을을 만나게 해 준다. 그 나무가 옷을 다 벗으면 겨울이 온 것이고 굵은 나뭇가지에 눈을 쌓아놓고 겨울을 낸다. 까치들이 앉을자리도 만들어주고 참새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노란 단풍색이 너무 고와서 한참을 바라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데 겨울을 잘 넘겼으면 좋겠다. 죽은 전나무의 그늘에서 빛을 받지 못해 등이 굽은 소나무가 햇볕을 받으며 굽은 허리를 조금씩 펴고 있는 옆으로 동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한다. 사람의 모습처럼 차들의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사진:이종숙)
같은 색도 거의 없고 모양도 다 다른 차를 타고 다니고 집 모양도 다 다른 집에서 산다. 모녀지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네를 걷는다. 함께 사는 딸이 버팀목이 되는지 엄마 되는 사람은 연신 웃는 얼굴로 걷는다. 무슨 이유에선지 몇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얼마 전에 이혼을 하고 딸과 함께 사는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행복해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지만 늘그막에 남편과 이혼을 한 데는 어떤 말 못 할 이유가 있겠지만 오죽하면 그 나이에 이혼을 했을까 하며 이해를 해본다. 세상이 험악하여 황혼이혼이 많아지지만 세상엔 이유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이 지나간 뒤로 버스가 와서 사람들을 싣고 가고 건너편에 사는 남자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동네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밌다.
잠깐 동안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머릿속은 평화를 만난다. 내 인생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인생을 구경하며 잠깐 머리를 식히며 다시 현실을 만난다. 아침도 먹었고 대충 집안 청소도 해놓았으니 바깥공기 한번 쐬러 나가는 일 만 남았다. 산책을 하며 세상을 보면 나도 구경꾼이 되어 마음이 넓어진다. 만남이 없는 요즘에 과연 누가 나와 친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년퇴직을 하면 친한 사람들하고 여행도 하고 시간을 함께하며 더 친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이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삶이 있기 때문에 더 가까워지지 않는다. 친구들도 세월 따라 변하고 우리들 마음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어딜 가나 무엇을 하나 함께하는 남편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함께하기에 자칫 외로울 수 있는 퇴직생활이 즐겁다.
젊었을 때는 돈 버는 것만 생각하다 산책 한번 제대로 못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좋은 곳을 가까이에서 날마다 찾으며 산다. 멀리 여행 가서 고생하느니 집 가까이에 있는 숲을 찾고 강가를 걸으며 살아가는 지금이 행복하다. 자연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외면만 하고 살았다.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걸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안 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찾지 말고, 갈 수 있는 곳에 가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살면 된다.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이 배낭에 물한병과 초콜릿바 하나 넣고 나가 걸으면 된다. 나가보면 세상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나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름다움을 느낀다. 바깥을 보며 멍 때린 시간 덕분에 산책시간이 늦었다. 어서 나가서 자연을 힘껏 포옹하며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