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잠바가 투박해 보여도 아직은 벗을 때가 아니다. 은근히 추운 봄추위로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입고 다니지만 누가 뭐라 해도 이제는 봄이다. 멀리 보이는 들판과 나무들은 겨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양지쪽에는 어느새 파란 것들이 세상을 구경하겠다고 땅을 헤집고 나온다. 눈보라를 견디며 겨울을 난 나무들은 살아난 기쁨에 기지개를 켜며 구부렸던 허리를 편다. 겨우내 가지 위에 눈을 맞고 그 눈이 다 녹아 이제는 움이 트고 싹을 내며 이 찬란한 봄을 맞는다. 집안일도 손에 잡히지 않게 하늘이 맑고 바쁘게 짖어대는 새소리가 나를 유혹한다. 동네 한 바퀴 돌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와 눈 녹은 동네를 천천히 걸어본다. 동네는 사람들 소리도,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참으로 조용하다. 길을 걷다 보니 학교 갈 나이는 안되고 집에 있기는 심심한 나이의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뒤집어 놓고 무언가 고치는 시늉을 한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마다 지난해 늦게까지 단풍잎을 내려놓지 못하고 겨울을 맞은 나무들이 보인다. 눈 밑에서 겨울잠을 자던 마른 잎들이 거리를 굴러 다니고, 싹이 나지 않은 나무들의 모습은 늦가을의 어느 날 같다. 주위를 둘러보며 걷다 보니 집 가까이에 있는 쇼핑몰까지 오게 되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난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 놓고 먹는다. 혼자 앉은 사람들, 여럿이 앉아서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할 일 없는 심심한 노인들은 군데군데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다리가 피곤하여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급하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무언가를 잔뜩 사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고 가게에서 구경만 하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겨울은 아니지만 봄도 아닌 애매한 날씨로 사람들의 옷차림도 봄반, 겨울반이다.
두꺼운 코트를 입은 사람도 있고 얇은 봄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나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필요한 물건도 없어 그냥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반갑게 나에게 인사를 한다. 이름을 부르며 잘 있었느냐며 반가워하는데 모른다고 하니 그제야 친구와 너무 닮아서 착각을 했단다.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흔히 있는 일이다. 처음 이곳에 이민 왔을 때는 동양인들이 별로 없었고 백인들이 많았는데 내 눈에는 다 같아 보여서 나름대로 얼굴 특징으로 기억을 하곤 했다. 인도 사람들과 필리핀 사람들도 구별이 안되어 여러 번 실수를 한 생각이 난다. 옆집에 인도 사람이 살아 어쩌다 뒤뜰에서 만나면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였다. 어느 날 쇼핑몰에서 내가 그녀를 만났는데 전혀 알아보지 못하니까 그녀가 웃으면서 “네 옆집에 살잖아.”하여 미안했던 생각이 난다.
(사진:이종숙)
쉴 만큼 쉬었으니 서서히 집으로 향해 걸어 본다. 가는 길은 부지런히 걸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여유롭게 걸어 보았다. 갈 때 보지 못한 것들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침엽수는 완연한 연초록색으로 변해있고 활엽수도 싹이 나오는지 연한 빛을 띠고 있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는데 멀리 호숫가에 연인인듯한 남녀가 몸을 기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고 자전거 도로에도 몇 명이 자전거를 타며 봄을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긴 겨울 동안 보이지 않던 오리들이 하나 둘 날아온다. 봄 여름을 이곳에서 살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떠난다. 심심한 오리 한쌍이 호수 옆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땅에서 무언가 꺼내서 찍어본다. 겨울을 벗은 길거리는 어디선가 날아온 쓰레기들이 군데군데 버려져 있고 성급한 사람들은 반바지를 입고 산책을 한다. 봄은 이렇듯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새봄을 맞이한다.
봄은 어쩌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봄을 헤치고 들어가는 것 같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봄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고 새들은 바쁘게 날아다니며 봄을 만끽한다. 해마다 봄이 왔나 하면 꽃샘추위로 썰렁하던 기억이 많은데 올해는 따뜻한 봄이 오기를 한번 기대해본다. 겨울이 다가오는 11월에는 눈이 세상을 덮을 것으로 생각하며 우울했는데 봄을 맞는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추운 봄이라도 파랗게 변할 세상을 생각하면 희망이 부푼다.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를 것이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꽃들이 피어날 것을 생각만 해도 좋다. 이곳의 봄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봄이다. 겨우내 기다리고 봄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면 어느새 봄은 떠날 채비로 바쁘다. 봄이 왔나 하면 가야 할 시간이고 여름은 당연한 듯 자리를 차지하고 웃고 있다. 소리도 없이 잠깐 다녀가서 일 년 내내 그리워지는 봄은 아쉬움만 남기고 간다.
어느새 집이 보인다. 옛날에는 빨간 지붕에 하얀색 담이었는데 몇 년 전에 회색 지붕을 새로 하고 작년에 담도 회색으로 칠을 했다. 집은 오래되었지만 지붕과 담이 잘 어우러져 새집 같은 기분이 든다. 집도 사람처럼 오래 살다 보니 정이 많이 들었다. 의젓하게 동네를 지키고 서 있는 집에서 아이들 다 키우고 손자 손녀들이 오면 즐겁게 뛰어 논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게 우리를 품어주는 집에서 행복을 만들며 오래도록 살고 싶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다니며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하며 나를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계절처럼 왔다가는 인생이다. 아쉬움이 남아도 가야 하고 미련이 있어도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아직은 겨울 같은 봄이지만 정령 봄이다. 마음은 이미 봄을 맞고 싹을 피우고 꽃을 가꾸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봄이 손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