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비어 가는 냉장고를 볼 때마다 날듯이 가볍다. 오랫동안 식당을 하던 나는 집에서 요리를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식당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에 재료를 사다 놓고 필요한 만큼만 요리를 해서 집에 올 때 갖다 먹고 설거지는 접시 닦는 기계에 넣으면 부엌에서 할 일은 끝났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냉장고가 꽉 차면 답답하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며칠 지나면 상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장을 욕심껏 안 보려 노력한다. 작년 이맘때 코로나로 외출금지령이 내렸을 때 멋도 모르고 장을 많이 봤다가 먹지도 못하고 버린 것을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오늘 아침에 냉장고를 보니 빈자리가 많다. 열심히 사다 놓고 열심히 먹어야만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많아서 못 먹는 것보다 없어서 못 먹는 게 속이 편하다. 없으면 가서 사면 되지만 못 먹고 놔두면 썩는 게 음식이라 안 좋다. 모든 게 부족하던 때를 생각하면 버리는 게 너무 죄스럽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장을 봐 놓으면 바로 없어져 일주일에 두세 번을 가야 했는데 요즘엔 남편과 둘이 먹기 때문에 조금 사 와도 일주일 넘게 먹을 수 있다. 슈퍼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특별 세일을 해서 세일하는 것 몇 개만 사 와도 충분하다. 지난주에 사다 놓은 채소가 조금씩 줄어들어 좋다. 열심히 먹어야 하는데 점심을 잔뜩 먹고 나면 저녁 생각이 별로 없어 대충 먹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사다 놓은 음식들이 냉장고에서 시드는지 썩는지 모른다. 옛날처럼 먹히지 않고 냉장고도 채워놓기가 싫다. 상추도 몇 잎 먹고 말고 고기도 몇 점만 먹는다. 입맛이 변했는지 양이 줄었는지 맛있는 것도 없고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활동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때가 돼도 배가 안 고프고 맛있는 음식이 생각이 안 난다. 누가 음식을 해주면 식욕이 생길지 모르지만 음식을 만들 때 몇 번 간을 보고 막상 앉아서 먹으려면 별 생각이 없다.
아이들이나 와야 이것저것 없어지는데 애들 구경한지도 오래되고 보니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은 줄지 않고 더 많아지는 듯하다. 그래도 버리는 것보다 해 먹어 없애야지 하는 생각으로 며칠 열심히 먹었더니 냉장고가 비어 가고 내 마음도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여기저기 채워 놓아야 좋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지금은 공간이 좋다. 옷장도 신발장도 헐렁한 게 좋고 책장도 서랍장도 비우는 게 요즘 내 취미가 되었다. 해 먹을 게 없다고 장을 보고 또 보고 하다 보면 뒤에 숨어서 못 먹은 것은 버리고 또 사다 놓고 살았는데 지금은 무엇이든지 꽉 차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세상이 어지러워 혹시라도 장 보러 나가기 힘들어질까 봐 여유로 몇 개 더 사다 놓으면 결국에 유효기간이 지나 버리는 경우가 많다. 왜 요즘엔 유효기간이 그렇게 짧은지 사다 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먹으려고 하면 지난 것을 알게 된다. 그만큼 세월이 빠른 것이다.
세상은 변하여 카드 하나로 매사가 해결되는 세상이다 보니 돈 구경을 할 수가 없다. 하루에 사용하는 신선한 식재료를 아침 일찍 택배로 받으며 산다. 장을 많이 볼 필요도 없고 뭐든지 쌓아 놓고 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어 돈 세는 재미로 산다는 사람도 많았는데 지금은 현금을 쓸 곳도 없고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다. 눈에 보이는 많은 물질로 행복했던 시절은 가고 숫자로 주고받고 행복해하는 시대다. 배달음식이 대세인 요즘 세상에 냉장고에 많은 재료가 필요가 없다. 코로나로 집밥을 해 먹을 수밖에 없어도 여전히 바쁜 젊은 사람들은 배달음식을 선호한다. 수십 가지의 반찬을 늘어놓아야 마음이 풍요로웠던 시대는 가고 간단하고 단순한 밥상을 좋아한다. 있는 대로 꺼내놓고 부족한 것 없이 맘껏 손님 대접을 하는 것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직접 만든 음식으로 귀한 손님을 대접해야만 성의가 있었는데 번거롭고 복잡하지 않는 생활방식으로 변했다.
먹지도 않는 반찬을 매 끼니때마다 넣다 뺏다 하기를 반복하는 것보다 한두 개 꺼내서 먹고 마는 게 좋다. 이집저집 돌아가며 음식을 나눠먹던 옛날에는 밑반찬도 여러 가지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모이면 별미로 내놓고 먹었다. 깻잎과 마늘종 그리고 마늘장아찌와 고추장아찌는 기본적이었는 데 어쩌다 한두 개 집어먹다 보니 열심히 담지도 않고 상에 올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장을 보러 가서 장을 보기가 두렵다. 옛날에 나이 드신 어른들이 장을 보던 모습이 생각난다. 당근 두 개 양파 하나 호박 한 개를 사시는 것을 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 내가 그 성황이 되었다. 조금 사서 버리지 않고 먹는 게 최고다. 이제 이곳도 음식물 찌꺼기를 따로 하고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수거한다. 지금까지 편하게 살아온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내 마음 같으면 한두 개만 사고 싶은데 어떤 것들은 다발로 되어있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텅 빈 냉장고를 보면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꽉 찬 냉장고가 불안하다. 조금만 사야지 하면서도 장을 보러 가면 이것저것 사 오게 된다. 이번엔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필요한 것만 사야지하고 들어가면 마음이 약해져서 또 산다. 애들이 오면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면 맛있게 잘 먹겠지 하며 하나둘 집어넣다 보면 냉장고가 꽉 찬다. 꽉 찬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먹는다. 끼니때마다 해 먹을 것이 없다면서 진수성찬은 어디서 나오는지 만들어놓은 나도 기특하다. 꽉 찬 옷장을 보며 입을 게 없다고 투덜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다 놓느라고 애쓰지 말고 버리느라고 고생하지 말아야 한다. 배고플 때 생각해서 냉장고를 배 불리면 냉장고도 힘들어 땀을 흘린다. 나도, 냉장고도 다이어트를 하며 텅 빈 냉장고를 보며 날아갈 듯이 가벼워진다. 냉장고를 비우며 내 마음도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