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폭탄을 맞은 꽃들이 기운을 차리고 살아났다. 몇 개는 여전히 엄살을 부리며 누워서 능청을 떨고 있지만 다들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없어 밀렸던 산책을 나간다. 며칠 전 온 눈으로 길이 질퍽하여 숲 속의 오솔길을 걷기 힘들 것 같아 넓은 산책길로 걷는다. 요즘엔 하루가 다르게 숲이 우거진다. 눈 온 끝이라서 기온이 낮아 두꺼운 옷을 입고 한적한 곳을 걸어본다. 누군가 피크닉 테이블에 놓아두고 간 해바라기씨를 다람쥐가 열심히 먹는다. 사람들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고픈 배를 채우느라 열심히 먹길래 사진 몇 장 찍고 지나친다. 모자를 썼는데도 목덜미가 써늘해서 재킷에 달린 모자를 더 쓰고 걸어본다.이른 시간도 아닌데 아주 춥다. 아무리 추워도 15분 정도 걷다 보면 더워지니까 10분만 더 참자며 앞으로 전진한다.
매일 가는 곳이 아니고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왔는데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처음 온 곳처럼 새롭다. 한겨울에 꽝꽝 얼었던 계곡물이 눈이 와서 그런지 콸콸 흐른다. 겨울에 쌓여있던 모든 더러운 것들이 다 씻겨 나갈 듯이 힘차게 흐른다. 다리를 건너며 멀리 보이는 숲을 바라본다. 겨울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그곳에 봄이 있던 것처럼 하늘과 숲이 맞닿아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집에서 있으면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을 텐데 이렇게 나와서 아름다운 세상을 보니 좋다.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좋은 날을 기원한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숲을 찾는 마음이 같아서 인지 친밀감을 느낀다. 다리 옆 나무에 누군가가 나무로 예쁘게 만들어 놓은 새 먹이 통이 보인다.
(사진:이종숙)
버섯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언뜻 버섯이 자라고 있는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정교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예쁘게 만들었는지 감탄한다. 곧게 뻗은 전나무들과 소나무가 하늘로 향해 자라고 나무들이 크고 굵어서 그런지 나무들이 서있는 땅에는 잡풀 조차 자라지 않는다. 숲이 깊어서 햇볕이 들어올 것 같지 않은데 길가에는 어느새 여러 가지 풀들이 앞을 다투며 자란다. 기다리던 봄은 어느새 와서 저만치 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봄이 안 온다고 불평만 하고 산다. 행복이 같이 사는 것도 모르고 행복을 찾으러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마음은 봄날처럼 변덕이 심해서 마음속에 여러 가지 작은 마음들과 함께 사느라 바쁘다. 여러 가지 나무들과 풀들 그리고 들짐승들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질서 정연한 숲의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아마도 해야 할 일을 알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서로를 배려하며 거리두기를 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꼭대기에 도착해서 아래를 내려보니 까마득한 계곡물과 깊은 숲이 보인다. 두 마리의 오리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푸드덕하며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잠깐 숨을 고르고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냉골이 있는 트레일을 따라간다. 지난해 뜨거운 여름에 한번 왔었는데 그때도 두꺼운 얼음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일 년 내내 추운 곳이다. 한 아기 엄마가 아이를 안고 지나간 것 외에는 사람들이 없다. 날씨가 춥기도 하지만 코로나 방역이 강화된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집콕을 한다. 백신조차 부작용으로 신경을 쓰는 세상이니 당분간이라도 조심하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사는 게 최선이다.
(사진:이종숙)
무증상이나 변이종이 더 무섭다는데 보고 싶고 궁금한 마음에 만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서로가 불편하니 다음으로 미루며 살아야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다시 온 길을 따라 내려간다. 올 때 보지 못하던 나무들이 보여 새삼스럽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얀 백양나무 숲이 아름답다. 급히 언덕을 오르기 위해 보지 못하던 것을 내려오면서 본다. 이파리가 빨간 나무가 새삼 눈에 띄어 가까이 가본다. 몇 번을 왔던 곳인데 처음 보는 듯하다. 해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고 내 기분에 따라 다른 자연의 색이 참 멋있다. 햇볕 쨍쨍 내리쬐는 날은 모자를 써서 잘 보지 못하기도 하고 추운 날은 어깨를 웅크리고 땅을 보고 걷기에 잘 못 본다. 세상일이 다 그런 것 같다. 볼 것 다보며 살다 보면 할 일을 못하고, 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구경을 못한다.
돈을 벌어보겠다고 열심히 사느라 이렇게 가까운 곳에 좋은 곳이 있어도 오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지금부터 라도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와야겠다. 오래전 나는 일하느라고 바빠서 산책이고 뭐고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팔자 좋게 산책 다닌다고 했는데 내 팔자도 산책 다니는 팔자가 되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급한일도 없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하며 살면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음이 더 편하다. 날씨가 추워서 올까 말까 하던 마음으로 나온 산책길에 만난 나무들이 만나서 반갑다고 또 오라며 손을 흔든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며칠 안 보면 궁금한 숲에서 행복을 한 아름 안고 집을 향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불가능한 요즘에 자연을 만나며 소통한다. 숲 속에서 인생을 배우고 삶의 소중함을 알고 간다.
인간은 자연을 찾고 자연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돌려준다.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힘껏 날아간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인연은 이렇게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모든 생물들을 만나게 한다. 오늘 내가 만난 모든 인연에 감사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