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하늘이 깜깜하다. 천둥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요란하다. 올 것 같지 않던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열어 놓았던 창문을 닫으며 2층 창문에서 차고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제법 세게 떨어져 사방으로 튄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오나 했더니 언제 그랬느냐며 딱 그치고 시치미를 뗀다. 밤하늘은 구름이 내려앉은 듯 어둡고 오던 비는 멈추었다. 길은 젖어 지나가는 차들이 미끄러지듯 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 종일 손주들 쫓아다니느라 피곤해서 누워 있다가 빗소리를 듣고 일어났더니 오던 잠이 멀찍이 도망갔다. 퇴직하면 손주들과 이런저런 것들을 하면서 재미있게 보내고 싶었는데 막상 꼬맹이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저녁때는 녹초가 된다.
그들이 내게 주는 순간순간의 기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인데 몸은 못 따라간다. 틈틈이 지루하지 않게 놀아 주어야 하고, 배고프지 않게 먹을 것 챙겨주며, 사고 치지 않게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한다. 아들과 며느리는 돈을 벌어보려고 애쓰며 사는데 손주들이라도 잘 봐야 하는데 그것도 일이라고 몸이 데모를 한다. 옛말에아이 보는 것보다 밭 가는 게쉽다는 말처럼 어린것들 쫓아다니는 게 쉽지 않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만지고 참견하는 손주들은 할머니 사정은 모른다. 요구사항도 많고, 하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도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찌감치 애들 보는 기술이라도 배워둘걸 그랬다. 내가 애들을 키울 때와는 천지차이로 세상이 달라졌다.
어린것들도 게임을 하고 혼자서 손가락을 오르내리며 아이패드를 한다. 틈틈이 텔레비전을 보고 뒤뜰에 나가서 놀며 저 나름대로 생각하며 노는데 여간 바쁜 게 아니다. 물장난을 하고 젖은 채로 집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만지고 남매가 싸우고 울고 웃는다. 아이들 키우던 생각은 전혀 나지 않고 모든 게 새삼스럽다. 일하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은지 잘 놀다가 엄마 아빠한테 매달리고 부르며 울 때는 어쩔 줄 모른다. 온라인 회의 중에 아이들이 울고불고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와서 달래고 부리나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힘은 대단하다. 나도 그 나이 때는 일 하느라 어떻게 세월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어수룩해서 어린애들을 집에 그냥 놓아두고 일을 다니던 때다.
무슨 큰돈을 많이 벌겠다고 겁도 없이 철없는 어린애들을 집에 놔두고 다닌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아침에 9살짜리 큰 아들 목에 열쇠를 걸어주면서 연년생 동생들 데리고 밥 먹고 학교 가라 하고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고 나는 퇴근하여 밥해서 먹이고 또 일을 나갔다. 아이들은 먹고 놀다 지쳐서 집안 아무데서나 누워서 자며 우리를 기다렸던 날들이다. 이민생활에 기를 쓰고 일을 하지 않으면 가난을 유산으로 주어야 했기에 열심히 살았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잘 자라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아들이 그 나이에 동생들한테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엄마 아빠같이 고생하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찡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가 밤낮으로 일을 하는 모습에 일찍 철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이제는 그런 세월이 추억 속에 묻히고 손주들과 씨름을 하며 젊어진다. 놀이터에서 애들과 놀고 아이들과 빵을 만들고 과자를 만든다. 손가락 페인팅을 하고 티셔츠에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과 달리기를 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학교 운동장에 퍼지고 행복을 줍는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시간을 손주들과 함께 한다. 주위에 손자들이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이런 재미를 모를 것이다. 공공의 적인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은 손주들과 함께 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재택근무가 없을 것이고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생활할 것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반반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맞는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세상이 멈추었지만 어린 손주들과의 생활은 추억 속에 아름답게 남을 것이다.
손주들 잘 때 자고 손주들이 깨면 할머니 할아버지 하며 아침 인사를 하러 오는 손주들과 하루를 시작한다. 3살과 5살짜리 예쁜 손주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있는 온갖 시름을 잊고 먹이고 놀며 쫓아다닌다. 내 시간이 별로 없어 잠을 설치더라도 그들이 주는 행복은 어디에서도, 어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나를 따르며 웃음을 선사하는 손주가 있어 고맙다.내가 그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영혼에 사랑의 꽃을 피운다. 남편과 나는 손주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들은 내게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음을 알려 준다. 비가 잠깐 지나간 자리엔 스산한 찬바람이 분다. 더 늦기 전에 잠을 청하여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손주들과 반가운 인사를 하며 또 다른 내일을 맞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게 있다면 바로 손주들이다. 많이 안아주고 많이 사랑하며 그들의 행복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