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깍두기 한통씩 담으니 부자가 된 것 같다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후덥지근하다. 소나기가 기다려지는 오후다. 덥고 습하기까지 하니까 세상이 다 끈적거리는 것 같다. 하늘은 구름으로 흐리고 바람조차 없으니까 온몸이 찌뿌둥하기 까지 하다. 그래도 움직여본다. 가만히 있으면 더 축 늘어지고 기운이 없어진다. 배추를 사다 놓았는데 할까 말까 망설이며 내일로 미룰까 하다 씻어서 저리고 풀국을 끓여 식힌다. 속이 꽉 찬 배추가 아니고 봄동 같은 배추라서 물김치로 담는 게 맛있을 것 같다.



식혀놓은 풀국에 갖은양념을 한다. 고춧가루 새우젓 파 마늘 멸치 액젓 약간을 넣어 섞어놓는다. 절여진 배추가 숨이 죽어 푹 주저앉았다.

작은 김치통에 절여진 배추를 차곡차곡 놓고 물을 뺀다. 생각보다 양이 적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담는 김에 한 단 더 할걸 그랬다.

양념한 풀국을 배추 위에 부어준다.

국물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자박자박하다.

간을 보니 싱겁지도 짜지도 않게 맛있다.

손으로 주물럭 거리지 않고 살살 뒤집어서 꼭 눌러서 뚜껑을 덮어 놓는다.

실온에 하루정도 놓아두면 먹기 좋게 익을 것이다.


배추김치를 담그니 옆에 있던 무가어쩔 거냐고 묻는다. 국을 끓여 먹을까 생각했는데 깍두기를 담그면 좋을 것 같다.

무가 딱딱하고 야무져서 깍두기로 담그면 아삭거리고 맛있을 것 같아 도마에 잘라서 김치통에 담아 놓는다.

그릇을 여러 개 쓰면 설거지거리도 많아지니까 작은 김치통에 무를 잘라 넣고 양념을 넣는다.

고춧가루 새우젓 소금 마늘 파 기본적인 양념을 넣고 섞어 꾹꾹 눌러 놓고 조금 있으니까 절여져서 그릇에 여유가 생겨서 다시 한번 대충 섞어 덮어 놓는다.

주물럭거리면 손맛이 생긴다고 하지만 나는 쉽게 한다.

대충 섞어서 간만 맞으면 뭐든지 맛있다. 너무 만지작 거리면 풋냄새도 나고 물러서 나중에 신선도도 떨어진다.

이삼일 있다가 냉장고에 넣고 먹으면 다른 반찬 하나도 필요 없다.

얼떨결에 생각지 않은 김치와 깍두기가 생겼으니 부자라도 된 듯이 기분 좋다. 반찬이 아무리 많아도 김치가 없으면 무언가 빠진 것 같은 게 한국인의 밥상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간단하게 김치를 담는데 괜히 망설이며 미루다 보면 김치가 똑 떨어져야 담게 된다. 귀찮고 하기 싫은 것 생각하면 단 하루도 못 산다. 재미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덥다는 핑계로 뒹굴거리다 보면 청소도 미루고 음식도 미루게 되어 엉망이 된다. 하기 싫어도 하면 뭐라도 되는데 안 하면 할 일이 쌓인다. 누가 대신해주는 사람도 없으니 미루면 나만 손해다. 옛날 같으면 며느리가 둘이나 있고 딸도 있으면 부엌에서 졸업해도 되는 나이인데 요즘은 어림없는 소리다. 각자 살기 바쁘고 오히려 내가 해 받쳐야 하는 시대에 바랄게 따로 있지 절대 아니다. 다행히 식당을 오랫동안 운영해서 부엌에서 음식 하는 것이 몸에 배어 무엇이든지 쉽게 하기 때문에 아직 큰 문제는 아니다.


어떤 때는 나가서 사서 먹는 음식보다 내가 해 먹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식당에 가서 맛없는 음식을 비싼 돈 내고 먹느니 조금 귀찮아도 재료 사다가 만들어 먹으면 편하다. 아이들도 언제부턴가 외식보다 집밥을 더 좋아하게 되어 은근히 내가 맛있는 것을 해주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손에 익숙하지 않아 서툴기 때문에 요리를 두려워하는데 간단히 맛있게 해주는 내 음식이 최고란다. 특별히 요란하게 하지 않고 후다닥 한 접시 만들어 놓으면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아 만들게 된다. 아침은 양식으로 간단하게 해 먹고 점심은 한식으로 먹는다. 밑반찬 몇 가지에 찌개를 끓이던지 고기를 구워 먹으면 된다. 저녁에는 국수나 냉면을 간단하게 비벼서 먹어도 여름에는 별미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김치만큼은 내가 직접 담는다. 김장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배추 한두 개 사다가 자주 해 먹는데 때로는 잘 익은 감장 김치가 먹고 싶다. 김치찌개도 해 먹고 돼지고기 수육도 싸 먹고 싶은데 너무 일이 많아 겁부터 나서 못한다. 식구나 많으면 억지로라도 할 텐데 두식구에 김장을 담그기가 쉽지 않다. 날씨가 우중충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는데 얼렁뚱땅 김치 깍두기가 생겼으니 당분간은 걱정 없다. 김치와 깍두기에 반찬 두어 가지 만들고 찌개나 국을 끓여 먹으면 진수성찬이다.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도 한국음식의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나이 들어 갈수록 옛날에 먹던 음식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귀찮다고 생각하며 누워 있었으면 이런 기분을 모를 것이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날씨가 흐리거나 맑거나 내가 할 일을 하고 나니 날아갈 것 같다. 맛있게 익어서 먹는 김치와 깍두기를 생각하며 하늘을 본다. 여전히 찌뿌둥한 날이지만 내 마음은 새처럼 가볍고 부자가 된 것처럼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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