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 할 때 오지 않았던 눈이 봄에게 그냥 자리를 내줄리가 없다. 며칠 전 입춘도 지나고 일주일 뒤에는 날씨가 풀려 봄기운이 돋고 초록이 싹트는 우수라는 절기가 오는데 엄청난 눈이 온다. 아침에 어젯밤에 온 눈을 대충 치우고 손주들 등교를 시켰는데 여전히 눈은 계속 내린다. 지난번 멕시코를 다녀온 뒤 엄청난 온도(멕시코 영상 30도, 이곳은 영하 39도) 차이로 시작된 감기가 아직 안 떠나고 있어 숲 속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도움이 될까 해서 수영 대신 산책을 가기로 한날인데 눈이 이렇게 오니 어쩔까 하다 눈 오는 날 낭만의 데이트로 남편과 산책길에 나섰다.
어젯밤부터 오는 눈이니 산책길은 눈이 엄청 쌓여있다. 사람도 별로 없는 숲 속은 꿈길을 걷는 듯 신비롭다. 어쩌다 지나치는 사람들과 웃으며 지나친다. 산책길도 숲 속도 눈이 하얗게 덮여있다. 계곡도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온통 눈으로 덮여 길인지 계곡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곳은 우리 집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계곡이다. 숲이 우거져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춥지 않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오직 나무들과 눈만이 존재하는 듯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사이좋게 우리를 반긴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차 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 자연의 중앙에 있는듯하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어 본다. 숲 속의 깨끗한 공기가 폐로 들어온다. 내 몸속의 노폐물이 다 나가는 듯 신선하다.
눈이 와서 어딘가에서 눈을 피해 있는지 새들도 다람쥐도 없다. 구불구불한 산책길로 걸어본다. 오래된 계곡이라서 산책길이 잘 닦여져 있다. 산책길 옆에 놓인 의자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여름 같으면 잠깐 쉬었다 가겠지만 그냥 지나쳐간다. 길을 따라 한없이 걷는다. 멋진 집들이 나란히 계곡을 바라본다. 숲에서 바라보니 정말 멋있다. 커다란 개인집이 아니고 여럿이 사는 콘도 같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사시사철 볼 수 있어 좋을 것이다. 눈은 여전히 오지만 눈을 맞고 걸으니 낭만의 데이트가 되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노년에 짝이 있음은 큰 행운이다. 친한 친구가 있다 해도 서로의 처한 상황이 달라 이렇게 눈 오는 날 함께 하지 못하는데 남편과 함께 눈 속을 걸으니 45년 전 연애하던 때로 돌아간다. 화려하지 않아도 순박하고 순수했던 젊은 날이 생각난다. 결혼 뒤 먹고살기 바빠 우리 둘만의 데이트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 눈 오는 날 남편과 함께 호젓하게 숲 속을 걸으 니 이거야 말로 낭만의 데이트이다. 엄청 큰 나무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껍질이 다 벗겨지고 기둥이 갈라져 있지만 여전히 씩씩하게 버티고 서 있다. 적어도 백 살은 되어 보인다. 하늘로 가지를 뻗치며 옆에 나무들을 감싸 안고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듬직해 보인다.
빨간색 페인트를 칠한 조그만 다리를 건너 본다. 양쪽 옆에 눈에 덮인 계곡이 예쁘게 보인다. 옆에 많은 자갈들도 눈에 덮여있는데 여름에는 계곡물이 정겹게 흐를 것 같다. 깊은 계곡 옆에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튼튼한 나무로 된 보호막이 세워져 있다. 보호막을 잡고 계곡을 내려다보니 아찔할 정도로 엄청 깊다. 지난여름에 수달을 만났던 곳이다. 여기저기 나뭇가지로 집을 만들어 놓고 수영을 즐기는 곳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나무로 만든 다리가 보인다. 계곡을 걷지 않는 사람들이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다리인데 무척 튼튼해 보인다. 다리 위에 사람 소리가 나서 바라보니 아기를 데리고 나온 가족이 다리 위를 걸어가고 있다. 눈은 여전히 온다.
한 시간 정도 걸으니 털모자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인다. 목도리에도 차곡히 쌓인다. 끝없이 이어진 숲길을 한없이 걷고 싶지만 눈은 그칠 줄 모른다. 아마도 오늘 하루 종일 올 듯하다. 나란히 서있는 나무들은 이 눈을 맞으며 봄을 만들고 있다. 어쩌면 지난해에 목이 많이 말랐는지도 모른다. 올봄에 잎을 만들고 꽃을 피려면 오늘 온 눈은 그들에게 생명수가 될 것이다. 2월에 오라는 봄은 안 오고 눈이 오니 야속하게 생각했는데 눈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을 생각하니 고맙다. 어차피 때가 되면 오는 봄인데 가기 싫어하는 겨울을 밀쳐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기다리자. 봄이 와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때까지 기다리자.
하늘도 땅도 나무도 모두 하얗다. 아직은 잎이 없고 꽃이 없어도 행복하다. 눈을 밟으며 걷는 발걸음이 신난다. 나무에 앉아 기대어 쉬는 눈도 사랑스럽다. 그림 같은 숲을 걸으니 마음이 온유해지는지 세상이 다 아름답다.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숲은 그야말로 환상의 모습이다. 곱게 갈아 놓은 하얀 빙수처럼 고운 눈을 맞으며 오랜만에 낭만의 데이트를 함께하는 짝이 한없이 고맙다. 산책하는 동안 좋아하는 나를 보며 당신이 좋다면 내일 다시 오자며 손을 잡는다.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오는 눈이 싫다고 투덜대지 않고 숲으로 나오길 정말 잘했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