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아침이다. 바람은 벌써부터 세상을 흔들고 하늘은 회색이다. 비가 오려나 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앞뜰에 노송의 허리가 하루가 다르게 굽어간다. 솔방울을 잔뜩 떨어뜨리고 지친 듯 무심하게 서 있다. 간밤에 토끼가 자고 갔는지 잠자리가 펴져 황토색 흙이 빨간 속을 내밀고 있다. 사람이 늙으면 모든 게 달라지듯이 가을을 맞은 자연도 뻣뻣하게 변해간다.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는 보기만 해도 풍요로운데 메말라가는 잔디는 왜 이리 보기 싫은지 한여름 가뭄에 이미 타 죽어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땅에 붙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계절의 순환을 거역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순리에 말라가는 자연 또한 한몫을 한다. 한여름 노곤했던 몇 개의 나뭇가지는 이미 삶의 끈을 놓고 시들어 간다. 지난 1년 반의 코로나 전쟁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난 수많은 영혼들이 저렇게 견디지 못하고 떠났을 것이다.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죽은 것은 다시 나지 않고 새로운 것들은 수없이 나와 지구를 차지한다.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은 없어지며 또 다른 모습으로 새로워진다. 숲 속에 사는 나무들은 혼자서 피었다 혼자 살다 혼자 가는데 사람들이 옮겨다 심은 나무들은 손질을 해준다. 실내에서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분재가 뜰에서도 존재한다. 다듬고 깎아주고 잘라주며 원하는 모양으로 원하는 만큼만 자라게 하며 자연까지 조절하려 든다. 사람을 대신하는 로봇이 나날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로봇은 사람의 일을 대신하며 인간 사회로 들어가 사람들의 직업을 빼앗아 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자꾸 로봇의 시장을 넓혀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쉽고 편하게 살고 싶어 한다. 아무런 제재 없이 개인생활을 침범하지 않고 살기를 원하기에 편리한 로봇을 만들어 사용하는데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편리를 위해 만든 돈의 노예가 되듯이 로봇의 노예가 되고 로봇이 점령하는 세상에서 노예가 되어 살지도 모른다. 인간의 두뇌로 만들어진 로봇은 인간의 머리 꼭대기에서 인간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로봇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만 앞으로의 삶이 두렵기도 하다. 이상기온으로 식량부족이 오고 직업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겠다. 식량이 없어져도 먹을 수 있는 건조 식량이 나온 지 오래되었다. 언젠가는 우리의 식량이 지금의 것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음식을 먹고살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고방식은 30년의 차이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소통 없는 관계는 무의미하다. 서로를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현재도 미래도 없다. 옛날에는 어린이들이 노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같은 세대도 이해하지 못하고 산다.
좋아하는 쇼를 보고 맘에 드는 게임을 하며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함께하며 공동의식을 가지고 살던 시대는 없어지고 개인 사회가 되어 간다. 너와 내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시대가 아닌 나의 세계만 있을 뿐이다. 하늘은 여전히 찌뿌둥한 채 비는 내리지 않는다. 흐린 바깥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괜히 우울해진다.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가물었던 여름에 목이 말라 비실비실 하며 앞뜰을 지키는 백양 나무는 다시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 작년 여름 폭풍우로 한쪽 가지가 꺾어져 지붕으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올여름엔 그런 폭우는 고사하고 가물기만 했다. 하늘이 주는 대로 햇볕을 받고 바람이 부는 대로 자라는 나무가 노년을 맞이했는지 껍질도 벗겨지고 한해 한해 달라진 모습이 되어간다. 20년 전 여름에 시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던 나무인데 시어머니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작고 하셨다.
올해 그 나무가 오랜 가뭄으로 힘들어할 때 집안에 우환이 있을까 봐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남편이 물을 주며 정성을 들여서 그런지 다시 살아났다. 사람처럼 나무도 아프며 늙어가나 보다. 살다 보면 가끔씩 아프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다. 건강해서 생전 아플 것 같지 않다가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맞을 때가 있다. 배가 아파서 펄펄 뛰며 죽을 것 같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 끊이지 않아 고생했다. 간혹 잠이 안 와서 잠을 설치더니 치아까지 데모를 해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여름이었다. 심하게 앓고 나면 마음은 성장 하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보면 생로병사의 의미를 느낀다. 주위를 살펴보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음을 알려준다. 건강만큼은 자신하던 사람이 갑자기 암에 걸려 하루하루 애쓰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건강검진으로 알게 된 결과는 어디에서 왔는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름없었다.
너무 늦은 상태에서 발견된 암덩어리는 아무도 모르게 그의 몸에서 자라고 있었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수술도 항암치료도 할 수 없고 이식이나 약물치료도 불가능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희망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다행히 암덩어리는 죽은척하고 움직이지 않아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하기를 바라며 살았다. 그러던 중 움직이지 않고 자라지 않던 암덩어리가 커지고 움직이며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없던 증상이 생기고 함께 살자고 보채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도삶은 지속된다.
나무도 사람도 애지중지 하는 애견도 때가 되면 다 죽는다. 세상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모든 것들은 유효기간이 있다. 물건은 때가 되면 소각시키고 다시 만들고 재활용을 하는데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삶은 내일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