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하얀 뭉게구름이 여기저기 두둥실 떠다니고 기력을 다 한 나뭇잎들은 조금씩 색이 바래며 말라간다. 단풍이 든다. 봄 여름 동안 뽐내며 살았으니 갈 때를 알고 준비를 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진다. 사고와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생과 사가 오고 가고 희극과 비극이 엇갈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살아간다. 여름과 가을의 자리바꿈으로 어수선하더니 완벽한 가을이 제 모습을 찾았다. 더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에 취해 본다. 하늘이 높은지 낮은 지도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기 바쁘던 젊은 날의 나는 가버린 여름처럼 보이지 않는다. 조용한 게 좋고 부드러운 게 좋으며 따뜻한 게 좋다. 너무 뜨거운 것도 싫고 강렬한 것도 싫다. 날카로운 것과 무딘 것이 싫고 너무 화려한 것도 사치스러운 것도 싫다.
급하고 강한 폭포보다 조용하게 흐르는 시냇물이 좋다. 뛰지 않고 걷는 것이 좋고 심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좋다. 몸은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복잡한 것에서 멀어지고 단순함에 편해진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가며 생각에 잠긴다. 하늘에는 여전히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모여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도 좋지만 조용한 동네를 걸어가며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사과나무에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화단에는 집집마다 다른 꽃들을 심어 놓고 산다. 노란색 빨간색 가을에 피는 꽃들이 만발하여 꽃잔치를 한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고 가는 차들이 몇 대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작년 가을에 사과를 한 보따리 따주던 집 앞을 지나간다.
올해도 사과가 풍년이다. 머지않아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땅으로 떨어지면 주인은 늘 그랬듯이 쓸어서 버릴 것이다. 봄에 벚꽃처럼 만발하는 사과나무 꽃을 보는 재미다. 사과로 여러 가지 디저트를 만들기도 하지만 세월 따라 생활이 달라져서 인지 굳이 집에서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내가 이민 왔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빵을 굽고 파이를 만들어서 나눠 먹으며 정을 쌓고 살았는데 이제는 사서 먹는 세상이 되었다. 살림을 하나둘 모으는 재미에 이것저것 사 들였는데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짐이 되어 하나둘 없애고 버린다. 새로운 물건들을 만들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도 옛날 것은 쓸모가 없고 자리만 차지한다. 요즘엔 에어 후라이어가 있어서 집집마다 쉽게 음식을 해 먹는다. 얼은 것을 비롯해서 못하는 게 없다. 베이컨이나 소시지를 구워 먹고 감자튀김이나 생선 그리고 스테이크를 구워 먹는다.
(사진:이종숙)
닭다리도 간단하고 쉽게 만들고 피자나 스파게티도 식당에서 만들어 바로 나온 것처럼 기가 막히게 맛있다. 그러니 좋다고 해서 사놓은 가전제품은 이제 뒷전으로 밀려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큰아들이 지난번 선물로 사주었는데 지금까지 아주 만족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점을 고려해서 만든 것 같다. 생선을 구워도 냄새가 나지 않고 소시지를 구워도 기름이 튀지 않아 좋다. 어쨌든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만들어 놓은 기계도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배달음식을 좋아한다. 각자 살기 때문에 무얼 먹고 사는지 모르지만 손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주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것 같다. 하기야 일하고 바쁘면 음식을 만들 시간이 없을 것이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놓고 출근하고 일하다 아이들 데리고 집에 오면 배도 고프고 힘도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것이다.
사람이 살려고 일을 하는데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산다. 아무리 좋은 기계가 나와도 사다 놓고 쓰지 않게 된다. 아이들 사는 것을 보면 나도 저러고 살았을 텐데 다시 살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쫓아다니며 다 하는 것을 보면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더러 돈을 주고 하라고 해도 이제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 한가롭게 걸어 다니고 조용한 음악을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너무 많은 것도 원치 않고 필요한 몇 가지만 있으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본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해 놓고 사는 사람이 있고 정신없이 늘어놓고 사는 사람도 보인다. 겉모습으로 단정하면 안 되겠지만 겉모습이 깨끗하면 집안 구석구석이 다 정리가 잘되어 있을 것 같아 보기 좋다.
물건이 많다 보면 정리하기가 당연히 힘든다. 필요한 물건이라 버리지 않고 살게 되지만 지저분하게 늘어놓고 사는 사람 집을 보니 빨리 집에 가서 필요 없는 물건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맞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나쁜 것은 반성하고 좋은 것은 배운다. 무에서 무를 만들기도 하고 무에서 유를 만들기도 한다. 유에서 무를 만들기도 하고 유에서 유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창조하고 어떤 사람은 파괴한다. 주위 사람을 보면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다. 작은 것도 소중히 여겨 끝까지 잘 보존하는 사람이 있고 버리고 사고 버리며 낭비하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사는 사람도 있다. 깨끗한곳을 찾아다니며 더럽히는 사람이 있고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복을 터는 사람이 있고 복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여러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얌체 같은 사람이 있고 말없이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손해를 알면서도 배려하며 참아내는 사람이 있다. 복은 복을 만드는 사람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