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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처럼 인생처럼 계절이 오고 간다

by Chong Sook Lee


아침부터 까마귀가 시끄럽게 지어댄다. 청명한 날씨에 바람이 없어 나무들도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 오는 가을이 아니라 이미 와서 자리 잡은 가을의 모습이다. 가나보다 했던 여름은 가고 오나보다 했던 가을은 어느새 세상을 차지하고 있다. 주인이 가고 손님이 다시 주인이 되어 있다. 사과나무를 타고 오르며 자라는 단호박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사과는 빨갛게 익어간다. 어제의 모습이 아니고 오늘의 모습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다본다.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들이 흐르는 계곡물을 막으며 잠깐 쉬어 하늘을 보고 가라고 한다. 흐르는 물은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 한 바퀴 돌며 먼저 흘러 간 물을 따라가기 바쁘다. 사람 키만큼 자란 들꽃들이 다 지고 말라가고 있다. 어느 날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며 지난여름을 생각하고 내년을 기약할 것이다.


사람이 자손 대대로 이어지듯 들꽃들도 해마다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해마다 다시 나와 자라고 꽃을 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가 시들어 죽는다. 언제 그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나 할 정도로 마른 잎이 되어 흐르는 시냇물만 바라보고 서 있다. 오랜만에 본 계곡에 보이지 않던 나뭇가지가 보이고 커다란 돌멩이도 계곡과 식구가 되어 앉아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정말 곱다. 파란 물감이 떨어져 세상을 파랗게 물들일 것 같다. 보지 않은 사이에 울긋불긋 예쁜 단풍 옷으로 갈아입은 숲은 곱게 단장한 예쁜 신부의 모습처럼 눈부시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나무들이 있어 가을은 외롭지 않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불 때마다 힘없는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오솔길을 덮는다. 풀들은 반쯤 누워 하늘을 보고 지나가는 내 발길을 잡고 잠시 쉬었다 가라 한다.


얼마 전 까지도 꼿꼿하게 자라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풀이 죽었다. 다람쥐는 겨울 준비로 바쁘다. 땅에 구멍을 파고 먹을 것을 모아 놓느라 나무를 옮겨 다닌다. 봄에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인디언 집은 오다가다 찾아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쓸쓸하게 서 있고 앞에 놓인 임자 없는 의자도 왠지 외로워 보인다. 계곡을 따라 걸어 가본다. 이 아름다운 가을이 지나 나무들이 옷을 다 벗으면 숲은 벌거벗고 나무 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니며 다람쥐가 뛰어노는 모습이 훤하게 보인다. 하나둘 입었던 숲은 하나 둘 버리고 땅을 덮는다. 사람들이 하나둘 쌓으며 살다가 나이가 들면 하나둘 버리며 사는 것처럼 자연과 인생은 닮았다. 여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놓고 간 옷을 누군가가 집어서 나무에 걸어놓은 것이 보인다. 여름에 숲이 우거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뭇잎으로 덮여간다.


나뭇잎이 세상을 덮으면 겨울이 오고 하얀 눈이 내릴 것이다. 봄에는 여름을 생각하지 않고 여름을 맞는데 왠지 가을이 오면 겨울을 생각하게 된다. 겨울이 왔다 가야 봄이 오는데 겨울은 싫다. 싫어도 맞고 함께 지내야 한다. 세상에 겨울 없는 봄은 없기 때문이다. 낙엽이 오솔길을 덮어 길을 숨겨도 나무를 보며 걸어간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연이지만 가는 길을 알려준다. 길을 잘못 들어도 돌아가다 보면 길이 있는 것처럼 살다가 길을 잃어도 길을 찾게 된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마른 흙이 미끄러워 살살 내려간다. 옆에 나무가 없기 때문에 미끄러지면 낭떠러지로 간다. 발을 옆으로 해서 조심하며 내려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오르기 위해 기를 쓰지만 잘못하다가는 낭떠러지로 미끄러진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이끌어 주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 다.


동식물이 함께 하고 생물과 미생물이 공존하며 인간과 교류하며 산다. 세상천지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가치 없는 것이 없다. 비와 구름과 바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햇빛도 아무런 힘이 없다. 좋고 싫은 것이 함께하여 세상은 이루어진다. 선과 악 또한 세상에 필요하다. 잡초가 없는 텃밭은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보기는 좋아도 비가 오면 흙탕물이 튀어 채소들이 지저분해진다. 잡초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채소는 잡초에게 영양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사람 또한 곱게 자란 사람은 악을 몰라 선하지만 악에게 맞서지 못한다. 좋고 나쁨을 가려내고 선과 악을 찾아내며 수많은 유혹에서 이겨낼 때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계곡을 따라 걷는다. 물이 많은 곳이 있고 깊은 곳과 얕은 곳이 있다. 고여있어 흐르지 못하는 곳도 있고 빠르게 흐르기도 한다.


걸림돌이 있으면 돌아서 가고 웅덩이가 있으면 쉬었다 간다. 해야 할 일을 하며 사는 인간처럼 가야 할 길을 찾아 흐른다. 오솔길에 하얀 나비 한쌍이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가을이 오고 떠나야 하기에 더욱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올해는 유난히 하얀 나비를 많이 본다. 어릴 적 봄에 하얀 나비를 보면 슬픈 일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멀리서 하얀 나비가 날아가면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던 기억이 난다. 가을이 가기 전에 후회 없이 사랑하는 나비의 모습이 보기 좋다. 계곡으로, 오솔길로 바쁘게 날아다닌다. 내 생애에서 가장 젊은 오늘, 나도 나비처럼 훨훨 날아본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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