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있기에 봄이 오는 것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

오랜만에 해님이 얼굴을 보여주며 밝게 웃는다. 이런 날은 무조건 나가야 한다. 춥다고 눈이 와서 위험하다고 안 나가면 나중에 후회한다. 넘어지면 안 되니까 신발에 스파이크를 끼고 숲을 찾았다. 눈 덮인 숲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눈이 많이 와서 넓은 산책로를 걸어본다. 봄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겨울의 모습은 신비롭다. 눈 덮인 계곡에 사이사이 얼지않은 물이 흐르고 넘어진 나무들은 모두 하얀 담요를 덮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을을 극찬하며 가을이 좋다고 했는데 지금 나는 겨울이 너무 좋다. 하얀 눈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덮어 정말 깨끗하다.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도 눈이 다 덮었으면 좋겠다. 다 벗어버리고 다 비운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눈을 덮고 있다. 싫다고 앙탈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고 그냥 말없이 받아들이며 순응하고 있다.


가지들은 엉켜진 채로 눈을 맞고 누렇게 말라버린 풀들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잔다. 자전거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한 길을 따라 걸어본다. 부드러운 하얀 눈이 푸석푸석 일어나 내 발길을 따라온다. 햇살은 나무 사이로 눈이 부시고 나무에 쌓였던 눈들이 하나 둘 바람에 날려 어깨에 떨어진다. 나올까 말까 망설이다 나오길 참 잘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보며 걸을 수 있음이 얼마나 행운인가. 심호흡을 길게 들이마셔본다. 신선한 공기가 시원하게 폐로 들어가 먼지를 깨끗이 청소해줄 것 같다. 걱정 근심이 넘쳐나는 인생사인데 숲 속에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자연과 함께 있으면 다 잊게 된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고 마음의 평화가 샘솟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서있기만 하는 자연인 것 같은데 생명을 준다. 지친 심신이 정화되고 희망이 솟으며 행복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은 인간의 마음을 비우게 하고 인간을 겸손하게 한다. 뜬구름을 잡는 마음을 없애주고 욕심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힘들었던 어제를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이 세상 만물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살아가다 세상을 떠나는 깊은 의미를 배운다. 나왔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기고 간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고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삶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 또한 전부가 아니다. 끝이 없고 시작도 없이 보이지 않고 이어지는 인연이다. 봄이 다되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맞으며 겨울은 봄을 품고 땅속에서 자란다.


(사진:이종숙)

가을의 모습은 없지만 겨울이 함께하고 봄에는 겨울의 모습이 없지만 겨울을 향해 간다. 딱 자를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어제 걸어온 길이 오늘에서 만나고 오늘은 내일과 만난다. 며칠 오지 않은 오솔길 속에 나의 발자국은 사라진 듯해도 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속일 수 없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자연이 안다. 나무에 차분히 앉아있던 눈이 바람에 흔들려 내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으며 아는 체하며 사랑을 전한다.


눈이 세상을 다 덮었는데 하나도 춥지 않다. 나무들이 촘촘하게 서 있고 눈 밑에 낙엽이 쌓여서 인지 아주 포근하다. 햇살은 구름 사이로 눈부신 얼굴을 내밀고 계곡을 녹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쌓인 오솔길은 신비하도록 아름답지만 위험도 따른다. 눈으로 덮인 나무뿌리나 돌멩이를 보지 못하면 미끄러워 넘어진다.


숲 속의 매력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으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늘 긴장하며 걷는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땅을 두 번 쳐다보며 조심하고 걸으며 방심하면 어디서든 마찬가지라는 것을 배운다. 하늘에 구름이 어디선가 몰려온다. 내일 눈이 온다고 하지만 아직은 좋다.


빨간 마가목 나무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서 열매가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듯하다. 거의 매일 보는 나무들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하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에 많은 이파리를 달고 으스대더니 예쁘게 물감을 들이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는다.


눈이 온 숲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다. 누가 겨울이 황량하다 했던가. 겨울이 오는 것이 두렵지만 겨울은 겨울만의 운치가 있다. 겨울은 죽음을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새 생명을 낳기 위한 계절이다. 겨울이 없다면 봄도 없으리라. 겨울 동안 봄을 준비하지 않으면 어찌 봄이 세상에 피어 날 수 있겠나. 추워서 싫다고 빨리 가기를 원하기보다 겨울의 위대함을 찾아본다. 겨울은 한해를 뒤돌아보고 한해를 설계하는 계절이다. 지나간 과거 속에 아름다운 추억을 꺼내보며 새롭게 태어나는 봄을 계획하는 겨울이 있어 너무 좋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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