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도, 천리길도 시작이 반이다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얼마 전에 그린 그림을 지우고 새로 그렸다. 옛날 그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그림이 있었나 할 정도로 아무런 기억도 안 난다. 그림을 지울 마음이 생기면서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려고 생각해서 인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먼저 그렸다 지운 그림은 볼 때마다 고쳐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새로 그린 그림은 볼수록 마음에 든다. 그림에 이름과 날짜를 적으며 벽에 걸어본다. 오래도록 보고 싶어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넣고 아침저녁으로 틈나는 대로 오며 가며 쳐다본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좋았다가 싫어지기도 하지만 이번 그림은 오래도록 마음에 들 것 같다. 미술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잘 그린 것도 아니지만 내 마음에 든다. 제눈에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다르다. 나는 좋은데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을 좋아하고 나는 별로인데 다른 사람은 좋아서 갖고 싶어 한다. 세상은 그래서 굴러 가는가 보다.


다들 똑같은 것을 좋아하면 세상은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다. 음식도 옷도 가구도 취향이 다 다르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도 보기 힘들고 같은 집을 가진 사람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고 같아 보이지만 내부가 다르고 살림살이가 다르면 다르게 보인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성격이 같지 않다. 성격은 다르지만 잘 맞추며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것에 기준을 내세우고 주장을 한다면 다른 사람은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한쪽의 의견을 따라주고 양보하고 져주지 않으면 오래가지 않아 사이는 벌어진다.


그림도, 사진도 한때 좋았던 것들이지만 살다 보면 집안에 놓은 가구도 달라지고 생활패턴이 달라지면서 조금씩 변하게 된다. 큰 집에는 큰 그림이 필요하고 작은 집에는 작은 사진이 어울린다. 좋다고 다 끌고 다니며 살 수 없고 상황에 따라 현실성이 떨어지면 버려진다.


집안을 둘러보면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가만히 있는 물건들이 많다. 한때 좋아서 샀던 물건들이 세월이 가면서 사용하지 않고 산다. 없어도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림처럼 싫증이 나면 다른 그림을 그리면 좋은데 그렇지 않다. 거의 일 년에 한두 번 쓰는 물건들인데 멀쩡한 것들을 버릴 수 없어 그냥 놓아두는데 어떤 날은 몽땅 다 차 워버리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앞으로 몇 번 밖에 쓰지 않을 것을 끌어안고 살 이유가 없는데도 버리지 못한다. 지금껏 사서 모으기 바빴어도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다. 시대 따라, 세월 따라 사람도 변해야 한다. 딸이 많은 친정 엄마는 그릇계를 들고 이불계를 들어 딸들의 혼수를 장만하셨다. 그때야 모든 게 귀하던 시대라서 엄마가 장만해주신 혼수를 감사하며 받았는데 요새는 혼수도 본인이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친정엄마한테 혼수를 받았듯이 딸에게 혼수를 장만하면 좋을 것 같아 새로 나오는 전기제품이나 예쁜 이불이 있으면 틈틈이 사서 모았다. 막상 딸이 결혼을 할 때는 이미 더 좋은 물건들이 나와 내가 사놓은 물건들은 구식이 되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게 때가 있다는 말이 맞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도 좋고 앞일을 생각하는 것도 좋은데 십 년 이면 강산이 변하던 시대가 아니고 하루에 강산이 개발되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떠나면 나의 흔적은 지워진 그림처럼 없어질 것이다. 자손들은 얼마 동안 나름대로 나를 기억하겠지만 세월 속에 묻혀버린다. 물건도, 사람도 지워진 그림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결혼 전에 쓰던 물건이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리를 하라고 하면 엄마 물건부터 정리하라고 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내 살림에 비하면 아이들 물건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가만히 놔뒀다가 나중에 몸만 빠져나갈 수도 없으니 하루빨리 정리를 해야 하는데 귀찮아진다.


물건을 살 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버리는 것이 잘 안된다. 틈틈이 버려도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지워버린 그림처럼 버릴 물건은 하루빨리 정리하자. 복잡하기만 하지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에 미련 두지 말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이 오늘도 제 자리인양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지고 있음으로 거추장스러운 것보다 없음으로 홀가분한 게 더 좋다. 볼 때마다 고쳐야지 하던 그림을 대범하게 지우고 새 그림을 그린 것처럼 한꺼번에 치우기 힘들면 하루에 한 개씩이라도 버려 보자. 그러면 일 년이면 365개의 자리가 날것이다. 용기를 내어 조금씩 하다 보면 숙제를 다한 시원한 마음이 들것이다. 정리도, 천리길도 시작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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