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늦잠이나 자고 싶은데 안된다. 주중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도 일찍 자게 되니 주말 역시 새벽형이다.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데 새벽에 잠이 깨면 다시 잠을 잘 수가 없다. 일어날까 말까 하다 보면 잠은 더 멀리 가버리기 때문에 바로 일어나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궁금했던 오늘은 어떤 날일까 생각하며 잠옷을 벗고 옷을 입는다. 곤히 자는 남편이 깰까 봐 살살 지하실로 내려온다. 아직 밖은 깜깜하다. 입춘이 지나서 해가 길어졌지만 해가 뜨지 않은 이 시간은 어둡다. 어제 그리다가 끝내지 못했던 그림을 본다. 봄꽃을 환하게 그려보려 시작했는데 색이 잘 안 나와 기다렸던 것이다. 무언가 이상할 때는 잠깐 덮어두는 것이 나의 습관이다. 거리를 두고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보면 안보이던 것이 보이고 방향이 보인다.
사람도 자주 만나면 정이 많이 들고 상대를 많이이해할 수 있지만 너무 가까우면 흠이 보이는 것처럼 때때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취미생활을 하면 싫증도 안 나고 할 때마다 새로워서 좋다. 어제 원하던 색이 오늘은 마음에 안 들 때도 많다. 그림이나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리지 않고 상상으로 그리기 때문에 쉽게 그려지면 30분 만에 끝내기도 하고 안될 때는 며칠도 간다. 안되면 덮어두었다 나중에 그리면 된다. 그래서 꽃을 생각했다가 바다가 되기도 하고 나무를 그리려 했다가 산이 되기도 한다. 인생이나 그림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해도 말없이 하루하루를 받아들인다. 내일 일을 모르지만 희망하며 소망하며 산다.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계획하고 기대한다.
인생은 계산한 대로 ,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될 듯하다가 안되기도 하고 잘 나가다가도 하루아침에 잘못된다. 아주 작은 실수가 큰일을 망치고 커다란 문제가 작은 일로 해결이 된다. 잘되리라 믿었던 일이 순간의 착오로 망쳐지고 더 이상 희망이 없던 일도 우습게 실타래가 풀린다. 마치 변덕 심한 하늘의 모습 같기도 하다. 구름 한 점 없던 파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나타나 비를 뿌리고 언제 비가 왔나 하고 맑아지며 다시 갠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순풍인 줄 알았는데 돌풍이 되기도 하듯이 세상살이 인생살이 정말 알 수 없는데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산다.
그리다 놓아둔 그림을 다시 그려본다. 원하는 색이 잘 안 나와서 이런저런 색으로 칠하다 보니 숲이 되었다. 나무를 몇 그루 세워본다. 가늘고 길고 굵고 짧은 나무들을 숲 속 가득히 그려 넣으니 제법 모양이 잡혀간다. 나무 아래쪽에 있는 땅에는 푸른 풀들을 그렸고 가랑잎들도 옅은 갈색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나뭇잎은 노란색과 연한 녹색으로 칠하니까 봄 색깔이 나온다. 이른 봄에 새잎과 가을에 미처 떨어지지 못한 누런 잎이 서로 잘 어울린다. 나뭇잎 사이사이에는 꽃을 넣어 보았다. 꽃과 잎이 만발한 숲이 되었다. 그림 안에 하늘은 맑고 청명하다. 꽃을 그리려다 숲이 된 그림을 바라본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 아래에서 봄이 뽀얗게 피어난다.
우리네 인생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한 데서 꽃을 피운다. 어제는 힘들었어도 오늘을 희망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잘 안될지라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 떨어뜨린 씨앗이 뿌리를 내려 어느 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 내지 말고 지금 안된다고 절망하지 말고 잠깐 덮어두자.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있지 말고 잠시 떠나보자. 가까이 볼 때 보지 못했던 것을 다시 보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어제 보이지 않던 것이 오늘 보인다. 비록 그리려던 꽃이 아니라 나무를 그리더라도 안 그린 것보다 낫지 않은가? 살면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둔 것들이 지나고 보니 참 많다. 조금만 참았으면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을 생각해 본다.
이민 온 뒤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만삭인 몸으로 이민 와서 연년생으로 아이 셋을 낳다 보니 영어를 배우지 못한 채 단어 몇 개 가지고 소통하며 살았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가며 나에게도 처음으로 내 시간이 생겼다. 이민 온 뒤 6년 만에 가져보는 내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캐나다에 이민 온 사람이면 누구나 국비로 20주의 영어를 배울 수 있다. 20주 가지고는 입도 못 뗀다. 그래도 일단 배워보려고 등록을 해서 20주 동안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많이 배웠는데 나에게는 6년 동안 사용해온 엉터리 영어가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그때 마침 정부에서 주관하는 엉터리 영어를 고쳐주는 특별 강좌가 있었는데 우연히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민 생활하며 앞뒤 다 빼고 단어 몇 개로 시작한 영어는 쉽사리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15주 동안 읽기와 쓰기 그리고 듣기를 기초부터 가르치는데 정말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내 입에 배어버린 나쁜 습성을 고치기가 정말로 힘들었다. 글로 쓰면 100점인데 말로 하면 30점 정도밖에 안되었다. 매일 쓰고 말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듣기와 문법 시험을 본다.금요일 시험을 보고 다음 주에 공부할 것을 시작해야 했다. 그때 당시 남편은 밤에 일을 하였다. 나와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남편은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우리가 집에 오면 저녁을 먹고 일을 갔다. 나 혼자 24시간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다. 살림을 하면서 아이 셋을 데리고 학교를 다니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아침 먹여서 학교 보내고 버스 안에서 숙제와 복습을 했다. 너무 피곤하여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잠에 곯아떨어져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다행히 종점은 우리 집에서 몇 정거장 안 떨어져 있기에 다시 돌아오는 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영어학교를 35주 다니고 나니 귀도 뚫리고 입도 열리기 시작하였다. 우리 세 아이를 가르친 유치원 선생님의 권유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7살짜리 고등학생들과 한 반에서 나이 든 아줌마가 공부를 하니 처음에는 아이들도 이상해 하더니 나중에는 솔선수범해서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영어가 되니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은 계속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남편 혼자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이들은 커 가는데 집도 마련해야 되고 저금도 해야 하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의 생활이 나무 불안해졌다. 그래서 하루는 맘을 단단히 먹고 직장을 찾아 나섰다.
그 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때로는 내가 열심히 공부를 계속했었으면 뭐라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없지 않지만 꽃을 그리려다 나무를 그린 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나 원하는 무엇인가를 이루기를 바라지만 "도 아니면 모" 다. 세상만사가 다 장단점이 있다. 그나마 배운 영어로 떳떳하게 할 말하면서 살아왔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오랫동안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영어가 안되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잘하지는 못해도 제대로 된 영어로 현지인들과 소통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림을 그리며 또 인생을 생각한다. 그림도 여러 가지가 잘 맞아야 멋진 그림이 되는 것처럼 인생 역시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오래 참고 기다리며 하나 둘 꿈을 이루어 갈 때 우리는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