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의 손길로 살아가는 삶은 위대하다

by Chong Sook Lee
(서진:이종숙)

봄이 허물을 벗는다.

여기저기 잘라져 나간 자작나무가 앞뜰에 쓸쓸히 서 있다. 몇 년 전부터 기력을 다해서인지 가지가 하나둘 죽어가고 나이가 들어도 오래 살기를 바라는데 내 맘대로 안된다. 까치와 로빈이 놀러 오고 참새와 블루제이가 숨바꼭질하는 나무인데 가지가 몇 개밖에 없어 휑한 것이 큰집에 남편과 둘이 조용하게 사는 우리 집과 같다. 세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 친구들이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던 생각이 난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아이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네 아이들이 많아서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이 놀러 왔다.


뜰이 넓어서 아이들 생일 때는 몇십 명씩 초대해도 좁은 줄 모르고 안팎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여름에는 피자를 만들어주고 바비큐를 하고 뒤뜰에서 물총놀이와 농구를 하며 놀았다. 겨울이 생일인 딸 생일날에는 벽난로를 펴놓고 아이들이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먹고 놀았는데 다들 나간 집이 나무를 닮은 듯 휑하다. 이제는 그 많은 아이들도 마흔을 넘긴 나이가 되어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기르느라고 한참 바쁘다. 사람이나 나무나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33 년 전, 이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작았던 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더니 세월의 풍파 속에 시달리며 갈 준비를 하는 것 보면 세월이 참 무섭다. 세상에 없던 것이 새로 생기듯이 있던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늘 같은 모습으로 함께 할 것 같았는데 어느 날 죽어있는 가지를 보고 그 나무를 올려다본다.


힘들구나

힘들었구나

얼마나 힘들면 이렇게까지 되었니

이런 줄도 모르고 나 살기 바빠서 보지 않았구나.

나 사느라 바빠서 돌봐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혼자서 중얼대며 죽은 가지를 만져보며 쓰다듬는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 할 것 없이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다. 말이 쉽지 한평생 살아가는 인생길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행복하기를 바라고 성공하기를 바라다보면 아이들의 행복과 성공을 비는 나이가 된다. 낳아주신 부모에게 효도 한번 못하며 살다가 떠나신 다음에야 후회하며 사는 게 인간이다.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으면 부모님 속을 안 썩이고 효도하며 살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고 살았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백분의 일이라도 부모님을 생각하고 살면 후회하지 않을 텐데 아이들과 먹고살 생각만 하며 살아온 자신이다.


이제 아이들이 자라서 가정을 이루어 바쁘게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을 때는 나이 든 사람들을 이해 못 하고 나이 들면 젊은이들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젊은이는 믿음직스러워 좋으나 본인이 나이가 들기 전에는 노인들의 삶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항상 푸를 것 같은 나무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을 본다.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나무 자르는 것이 싫어도 잘라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오래전 조카결혼식을 하기 전 날 날씨가 청명하여 하늘이 파랐고 단풍 든 자작나무는 곱게 물들어 한국에서 오는 형제자매를 한껏 반겨 주었다.


단풍 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던 날이 지나고 하룻밤 사이에 다음날 하루 종일 비가 와서 그 예쁘던 단풍잎이 다 떨어졌다. 세상에 영원한 게 없다고 결코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찬란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비를 맞아 나목이 되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해마다 그맘때가 되면 그때를 이야기하곤 하는데 올해도 변함없이 몇 개 남지 않은 가지가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해 겨울을 버티고 있다. 사람과의 인연처럼 우리 집에 심겨 우리와 함께 하며 세월을 살아온 나무가 고맙다. 함께 살아오는 동안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뎌내며 햇볕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아온 나무이다. 몇 해 전 심한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퍼붓는 날에 가지가 꺾어져 잘려나가 지붕으로 떨어져 누워있었다. 이제는 조그만 비바람도 견뎌내지 못하며 늙어 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인간은 사는 동안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 무언가를 하고 산다. 세상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 같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힘에 의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면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일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끌어짐을 느낀다. 새벽부터 떠들어 대던 새들이 조용해지고 태양은 말없이 동쪽 하늘에 떠오른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하라고 시키지도, 알려주지도 않아도 변함없이 반복된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서 성인이 되어 짝을 만나 아이를 낳아 기르다 늙어가며 생을 마치듯 나무도 다르지 않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것을 배우며 사는 것이 자연이다. 우리 집 앞 뜰에 서 있는 자작나무는 50년이 넘어서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몇백 년도 넘게 사는 나무도 있지만 사람처럼 나무마다 나무의 수영이 있다. 한동안 무성하게 잘 자랐는데 늙기 시작하더니 폭삭 늙어서 가지들이 죽어가기 시작하여 죽은 가지를 하나 둘 자르다 보니 원래의 멋진 모습이 없어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봄에는 파란 싹을 피우고 여름에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몇 개 남은 이파리지만 가을에는 단풍으로 자신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죽지 않고 버티는 나무를 보면 자연이 얼마나 거룩한지 알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위대하듯이 살아가는 길과 늙어가는 시간은 위대하다.


삶은 위대하다. 사람도 나무도 짐승도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창조주의 위대함으로 오늘을 산다.

크리스마스에 화려하게 단장한 자작나무(사진 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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