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버리면 평화를 만난다

by Chong Sook Lee



비가 온다. 시원하게 봄비가 온다.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이맘때 눈이 오는데 다행히 비가 와서 만물을 씻어주고 푸르름을 더해 준다. 아침 먹고 나서는 산책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 나가서 빗속을 걷는다. 우비를 입고 모자를 쓰니 걷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빗속에 배고픈 다람쥐가 나와서 어제 남겨둔 먹이를 먹느라 바쁘다. 불과 며칠 사이로 새싹들이 많이 나와 새파란 봄옷을 입고 서 있다. 땅 위에 있는 만물이 봄비를 맞으며 환희하며 기뻐한다.


봄이 조금 늦게 오는 건데 성질 급한 인간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한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꽃이 피는데 언제나 필까 하며 재촉을 한다. 안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데도 안달하고 속상해한다. 허리춤까지 쌓여있어 녹지 않을 것 같던 눈이 다 녹고 파란 잔디가 깔려있는 것을 본다. 보이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할 일을 하는데 믿지 않고 산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숲에는 깊고 넓은 계곡물이 강으로 연결되어 길게 흐른다.


어디서부터 오는지 모르는 계곡물이 세차게 흐른다. 비가 와도 오리들은 계곡에서 헤엄을 친다. 날이 좋으면 여기저기 쳐다 보고 사진도 찍으며 걸어가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열심히 걷는다. 비 온다고 집에 있으면 몸은 편하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나와서 걸으니 좋다. 눈이 쌓여 있던 자연이 겨울옷을 벗고 봄을 맞이 했는데 순식간에 봄은 떠나고 여름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가을이 가기 전부터 기다려 온 봄인데 홀대하면 일찍 갈지도 모르니 친하게 자주 만나야 한다. 긴 겨울잠을 자고 난 자연이 기지 개를 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자연이란 참으로 신비롭다. 죽은 듯한 식물들이 새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도 겨울에 잠자고 봄에 다시 새 옷 입고 태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위에 아픈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픈데 다행히 아직은 건강하여 자유롭게 움직이며 살아간다. 어제는 영상 20도가 넘어 이대로 여름이 오나 했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춥다. 변덕 많은 날씨가 마치 우리네 인생 같기도 하다. 매일이 따스한 봄날 같으면 좋으련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껴서 흐린 날을 살다 보면 좋은 날은 불과 며칠뿐이다.


내일은 좋은 날이 되겠지 하며 기다리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비가 오면 오나보다 바람이 불면 부나 보다 하고 살아야지 안 그러면 잠시도 못 산다. 비가 오다가 갑자기 해가 나와 반짝 개는 날도 있듯이 세상은 변화를 반복한다. 계속 내리던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개기 시작한다. 모자는 내 머리 대신에 푹 젖고 우비가 내 몸 대신에 푹 젖었다. 어깨부터 주르륵 흘러내리던 빗방울이 조금씩 말라간다.


참으로 편한 세상에서 산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몸이 젖지 않고 빗속을 걷는다. 비 오는 밖을 내다보는 것도 좋겠지만 막상 나오니 이것도 좋다. 만물이 비를 맞고 자라며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봄비를 맞으니 더 젊어지고 키도 더 커진 것 같다. 이번에 온 비로 세상은 초록의 물이 들고 윤기가 흐르는 새 잎을 세상에 선 보일 것이다.


비 오는 날 산책하는 사람이 이상해 보였는데 나도 비를 맞으며 자연을 만나고 자연을 닮아간다. 하늘이 주는 대로 받고 사는 자연처럼 욕심내지 말고 걱정 없이 오늘을 살자.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것처럼 비우며 버리며 살아가면 평화를 만날 것이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구름 속에서 해가 나온다. 비 오는 날 한 산책으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배운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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