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향적봉-백암봉-지봉-신풍령) 트레킹 기행문

[백두대간 트레킹 기행문 : 길 위의 길]

by 구자룡

[백두대간 14차 트레킹] 덕유산(설천봉-향적봉-백암봉-지봉-신풍령) 기행문

날자 : 2018.05.19(토)-20(일)

동행 : 구자룡, 박용상, 이경화

코스 : 설천봉-향적봉(1,614m)-백암봉(1,503m)-횡경재-지봉(1,343m)-대봉(1,263m)-갈미봉(1,210m)-빼봉(1,042m)-신풍령 / 총 13.8km

무주리조트 설천하우스(곤돌라 탑승장)에서 곤돌라 타고 설천봉에 올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19일 11시 15분)해서 향적봉 대피소에서 점심 먹고 지봉 헬기장 도착(19일 오후 5시). 다음날 지봉 헬기장을 출발(20일 오전 8시)하여 신풍령 도착(20일 12시 30분)

덕유산 설천봉에서 향적봉, 그리고 백두대간 백암봉에서 신풍령까지의 트레킹 기록(램블러)


백두대간 대봉에서 지리산 조망, 2018 © 추보 구자룡



에피소드 1. 열네 번째 트레킹 만에 드디어 계획대로 진행

2013년 8월 후배들과 첫 번째 백두대간 트레킹을 시작했다. 설악산을 시작으로 그동안 두타산, 청옥산, 선자령, 금대봉, 함백산, 태백산, 소백산, 조령산, 삼도봉, 덕유산 등 열세 차례의 트레킹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했던 후배들과의 멋진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계절별로 트레킹 하기 좋은 멋진 산을 검색하고 다른 분들의 산행후기를 검토하면서 우리들의 체력에 맞추어 계획을 세우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트레킹의 시작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새롭고 멋진 추억 하나 남기고 싶은 욕망에 욕심이 앞서기도 한 적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 부족이나 검색 미비로 계획 자체가 잘못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계획은 완벽했지만 체력의 한계에 부닥치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중도에 계획을 변경하기도 했다. 이런 많은 변경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게 동의해주고 따라준 후배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드디어 2018년 5월 덕유산 트레킹에서 모든 일정을 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시차를 두고 계획한 그대로 진행했다. 광명에서, 함양에서, 그리고 대구에서 각자 아침에 출발하여 들머리인 무주리조트 곤돌라 탐승장에 도착했다. 광명에서 출발한 나는 대구에서 출발한 경화와 김천구미역에서 만나 경화 차량으로 신풍령에 도착한 후 예약한 택시로 무주리조트로 향했고, 용상은 함양에서 버스로 택시로 이동하여 무주리조트에 먼저 도착하여 탐방예약과 탑승권을 미리 구매했다. 최근 제도가 바뀌어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가려면 예약이 되어야 가능하다. 하마터면 모든 계획이 뒤틀릴 뻔했다. 다행히 토요일 오전임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아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KTX가 10여분 연착하면서 일정이 꼬이는가 했는데 곤돌라 탑승에서 예정했던 대기시간이 사라지면서 1시간가량 절약하는 행운이 따랐다. 아마도 며칠 동안 폭우가 계속되어 산행을 많이 자제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며 즐거운 산행의 첫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수 차례의 트레킹에서 날씨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는 것을 체득했다.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획도 세우고 장비도 준비하지만 변하는 날씨에 대응하기에는 인간은 언제나 나약한 존재였다. 이번에는 전체 트레킹 내내 날씨가 좋은 상수가 되어 주었다. 뭉게 뭉게 떠 있는 구름 사이 청명한 하늘로 인해 향적봉에서의 조망은 천하일품이었다. 가까이 설천하우스에서 저 멀리 남덕유산을 지나 지리산 일 때까지 조망이 되었다. 우리의 목표인 백암봉에서 신풍령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북진 구간은 구름에 가려 아예 보이질 않았다. 이 구름이 비가 되지 않기를 기대하며 향적봉 대피소로 내려가 오징어와 미역을 넣은 해물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주목과 구상나무, 그리고 고사목을 보고 덧없는 인생을 생각했다.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산철쭉을 옆에 끼고 중봉을 지나 백암봉으로 향했다. 덕유평전의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조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백암봉에서 5km 정도 산행은 이름하여 ‘꽃길’이었다. 오늘의 야영지인 지봉 헬기장에 도착한 시각은 5시경으로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텐트를 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잠시 덕유산 전체를 그리고 멀리 지리산 능선까지 산상에서 감상하는 여유를 가졌다. 둘째 날 일정도 6km를 걸어야 하기에 평소보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8시 정각에 출발하여 대봉, 갈미봉, 빼봉을 지나 신풍령(빼재)에 12시 30분경 도착했다. 지나온 길과 마찬가지로 이 대간길 역시 꽃길이었다.

향적봉에서 구름에 쌓인 남덕유산을 조망하는 등산객, 2018 © 추보 구자룡


향적봉과 설천봉 위로 넘어가는 석양, 2018 © 추보 구자룡



에피소드 2. 꽃길

계절 따라 대간길의 모습은 바뀐다. 그 길이 그 길 같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그 길은 매 순간 다르다. 아니 다를 것이다. 걷는 그 시각만이 나에게 다가올 뿐이니 다를 것이라고 해야 맞다. 계절을 달리하여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같은 곳을 여러 번 산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대간길 어느 구간에 맞닥뜨린 그 계절에 따라 어떤 때는 낙엽으로 뒤덮인 '비단길'이 되고, 어떤 때는 하얀 '눈길'이 되고, 어떤 때는 퍽퍽 거리는 '먼지길'이 되기도 한다. 5월, 덕유산 대간길은 한마디로 ‘꽃길’이었다. 용상이가 명명한 꽃길을 따라간다. 산길을 함께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배낭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지만 심각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일까. 꽃길이라는 말에 모두 공감했다. 꽃터널이라 해도 좋을 것 같은 꽃길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덕유평전의 산철쭉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간길로 접어든 구간에는 철쭉꽃이 피어있었다. 낙화한 철쭉꽃을 '사뿐히 즈려밟고'(지르밟고가 바른 표현이나 김소월의 시를 인용하는 차원에서) 나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진달래꽃은 이 시로 인해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낭의 무게를 잊게 하는 마법 같은 꽃길이었다. 꽃이 있어 꽃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걷기에 참으로 좋은 길이었다. 더구나 지난밤 약간의 비가 내렸다고 하고 또 오전 시간에는 구름에 쌓여 있었으니 촉촉함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낙엽으로 덮여 있는 '비단길'은 언뜻 듣기에는 멋진 길 같지만 실제 걸어보면 애로가 많은 길이다. 지난가을 소백산의 갈곶산에서 고치령으로 가는 길은 낙엽으로 인해 여러 번 넘어지는 사고 아닌 사고가 있었다. 경화의 스틱 끝에 달라붙는 낙엽이 한잎 두잎 쌓이면서 순식간에 되네르 케밥(고기를 겹겹이 쌓아 올려 빙빙 돌려 불에 굽는 케밥) 같은 모양이 되었다. 낙엽으로 길바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작년 여름 부항령에서 삼도봉으로 갈 때는 폭염이었다. 대간길이 대체로 숲 길이기는 하지만 워낙 가물어 '먼지길'이 되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에 숨이 막히고, 무더위에 또 숨이 막히는 이중고를 겪기도 했다. 겨울의 '눈길'은 아이젠만 착용하면 비단길과 먼지길에 비하면 한결 수월한 길이라 생각된다. 이번의 '꽃길'은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최상의 길이라 할만하다. 산세의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이번 대간길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꽃길이었다.


백암봉에서 지봉으로 가는 대간길의 철쭉 꽃길, 2018 © 추보 구자룡



에피소드 3.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산철쭉을 어떻게 구분하지

5월 중순인지라 진달래꽃은 이미 다 졌다고 생각했다. 철쭉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작년에는 소백산 철쭉을 보기 위해 축제기간에 맞추어 갔지만 이미 비로봉에는 때늦은 몇 송이 만이 산객을 맞을 뿐이었다. 덕유산의 철쭉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기대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생각지도 못한 철쭉에 마음이 빼앗겼다. 그런데 철쭉이 아니라 진달래꽃 같다. 갈수록 헷갈렸다. 어느 것이 진달래이고, 어는 것이 철쭉인지? 동네 뒷산에 있는 진달래는 누가 봐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높은 산속에 진달래라니. 알쓸신잡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진달래가 참꽃이고 먹을 수 있는 반면에 철쭉은 독성이 있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는 용상이의 주장에 동의했다. 진달래는 연한 분홍이고 철쭉은 진한 분홍이라고 했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때 철쭉과 진달래를 구분하는 초등학교 교사의 방법을 경화가 설명했다. 철이 날카롭듯이 철쭉은 잎이 날카롭다. 반면에 진달래는 잎이 둥글다고 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나는데 반해 철쭉은 꽃과 잎이 같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 두배 이상 높이에 꽃과 잎이 함께 있는 꽃은 진달래 같다고 했다. 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읊었다.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나에게로 오는 꽃인데 그 이름이 헷갈리니 씁쓸한 시간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들을 기준으로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며 길을 걸었다.

글을 쓰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자 인터넷 검색을 했다. 찍어온 사진과 대조를 하면서 공부를 했다. 명쾌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헷갈린다. 식물 전문가들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산철쭉은 진달래과 진달래 속에 속하여 서로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잘 구별되지 않는다. 검색을 하면서 철쭉과 산철쭉으로 구분되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철쭉은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철쭉은 한자(漢字) 말인 척촉(躑躅, 제자리걸음)에서 유래한다는 설과 반대로 우리말 철쭉이 한자어로 표기되었다는 설도 있다. 진달래는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먼저 핀다. 철쭉은 잎과 꽃이 거의 동시에 난다. 철쭉꽃 안에는 검은 점들이 있지만, 진달래꽃에는 없다. 철쭉꽃 받침에는 점액이 있는데 반해 진달래꽃에는 없다. 진달래에는 독이 없어서 꽃을 먹을 수 있으며 참꽃이라 하지만, 철쭉꽃에는 독(그라야노톡신)이 있어서 꽃을 먹을 수 없으며 개꽃이라 한다. 산철쭉은 철쭉에 비해 꽃 색깔이 진한 분홍색이고 잎끝이 뾰족하며 잔가지가 많다. 철쭉은 고산에 많으며 연분홍색 꽃을 피우고 잎끝이 주걱 모양이다. 산철쭉은 철쭉보다 키가 훨씬 작으며, 잎과 꽃도 작다. 산철쭉은 잎이 먼저 나고 꽃이 핀다. 산철쭉의 잎 모양은 진달래와 비슷하지만 꽃은 진달래보다 크고 색깔도 진하며, 안쪽에 반점이 있는 것은 철쭉과 비슷하다. 나름 정리를 하면 덕유산에서 진달래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달래가 아니라 철쭉이고, 철쭉으로 생각했던 것은 산철쭉이라 판단된다. 그동안 우리들이 많이 봤던 철쭉은 산철쭉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명확하지 않다. 나의 한계다.


덕유산 중봉 근처 활짝 핀 산철쭉, 2018 © 추보 구자룡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산철쭉으로 물들어가는 덕유평전, 2018 © 추보 구자룡


덕유산 지봉 근처 활짝 핀 산철쭉, 2018 © 추보 구자룡



에피소드 4. 주목과 고사목

향적봉은 ‘향림(香林:주목 지칭)이 즐비하게 있으므로 산봉우리 명칭을 향적봉이라 했다’(조선 명종 시대 임훈이 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그만큼 주목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목 주변에는 구상나무들이 있다. 구상나무는 소나무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한단다. 고산 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주목(朱木, 붉은 나무)과 구상나무는 등산객들에게 좌표이자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나무다. 천년을 살아가는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고, 죽어서도 천년을 버텨내는 단단함에 또 한 번 놀란다. 변덕이 심한 고산지대의 기후를 이겨내고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목을 보며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 염려한다. 2014년 2월 눈 덮인 덕유산에서 봤던 그 고사목이 아직도 건재하다. 겨우 4년 전에 본 걸 가지고.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4년도 긴 시간이고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니 그저 마음속으로 걱정이 된 것이다. 마침 용상이가 옆에 있어서 주목은 죽어서도 천년을 간다는 데 그 이유가 뭘까라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답변을 했다. 나무가 단단하고 독성이 있어서 벌레가 갉아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우리 집 옆의 오동나무는 죽은 후 곧 썩었는 데 그 이유가 뭔가라고 다시 물었다. 오동나무는 전통적으로 관(棺)으로 쓰였는데 그 이유가 잘 썩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단다. 역시 자연과학을 공부한 결과다. 길을 걸으며 나눈 대화이니 사실 관계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우선은 과학적인 접근에 감탄을 했다. 이런 논리는 자연과학도와 사회과학도의 사고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우면서 탐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검색을 해봤다. 주목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고산지대 능선이나 사면에 분포하며 큰 가지와 줄기는 적갈색이며, 어린 가지는 녹색이다. 줄기는 가구, 건축물, 조각품, 바둑판 등의 목재로 쓴다. 목재는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있다. 주목은 생장이 몹시 느리다. 100년을 자라도 고작 직경 10cm 정도 자란다. 반면에 오동나무는 10년이 되면 목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생육이 빠르다. 오동나무는 자라는 속도에 비하여 훨씬 단단한 나무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도 적고 잘 썩지 않으며 불에 잘 타지 않는 성질까지 있다. 오동나무 목재는 가벼우면서도 마찰에 강해 책상, 장롱 등 가구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된다. 목재가 소리를 전달하는 성질이 있어 거문고, 비파, 가야금 같은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정리하면 주목과 오동나무 모두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다. 길 위의 과학은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이런 탐구는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탐험심이 싹튼 증거라 생각한다. 이 아니 즐거운가.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죽은 주목과 살아있는 구상나무 , 2018 © 추보 구자룡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죽은 주목과 살아있는 구상나무 , 2014 © 추보 구자룡



에피소드 5. 아무리 산행 준비를 철저히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백패킹 트레킹을 계속하면서 어느덧 산행 장비나 의류는 계절 상황에 맞게 잘 준비되고 있다. 더구나 경화의 배낭과 내용물이 전문가 수준으로 올라왔다. 너덜거리던 매트리스도 배낭으로 쏙 들어갔고 생수와 음식물도 적당하게 준비해서 전체적으로 산행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다만 용상이가 예측한 대로 경화는 배낭을 싸는 방법을 더 배운다면 훨씬 수월하게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산행을 마쳤을 때 일행 전체의 배낭에 참치캔 1개와 물 반 병만이 남았다.

5월이지만 며칠 전에 여름 같은 폭우가 내리면서 기온이 많이 내려갔었다. 그리고 덕유산 구간은 대략 1300미터 높이의 산봉우리들이 이어지는 능선이라 적어도 10도 정도 낮은 기온을 생각해서 초겨울 복장으로 공지했다. 이제는 척하면 삼천리다. 그렇게 각자 준비해 간 옷을 하나씩 껴 입었다. 다운재킷으로 저녁 7시까지 버티다 이후 보온 재킷을 껴 입고 8시에는 방수 재킷까지 껴 입었다. 이제 더 입을 옷이 없다. 9시가 되니 영상 4도까지 기온이 내려갔다. 온몸이 떨려 더 이상 밖에 있을 수 없어서 텐트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근수가 왔으면 쉘터를 치고 그 속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으며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다 밖으로 나와 별을 보고, 별을 보다 추우면 다시 쉘터에서 담소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산정에서 맞는 바람은 체온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갑자기 근수가 보고 싶은 것은 쉘터 때문일까 그리워서 일까. 업무 때문에 오지 못한 근수가 왔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약방의 감초 같은 진원이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밤새도록 강풍으로 잠을 설쳤다. 바람이 플라이를 치고 본체(이너텐트)와 마주치면서 스치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그 와중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겨우 3시간 잤다. 긴긴밤을 어찌하나 걱정하고 있을 때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한밤중에 대간길을 지나가는 등산객이라니. 두세명 같았는데 자는척하고 있었다. 랜턴으로 텐트를 비추는 것 같기도 하고 텐트 주변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어떤 상황일까 생각하면서 마음을 졸였다. 경화는 이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잠을 깼다고 한다. 용상이는 내가 바람에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들이 지나간 다음 다시 잠을 청했다. 자다가 뭔가 이상해서 눈을 뜨니 텐트의 바닥만 있고 본체가 날아가고 있었다. 얼떨결에 일어났는데 꿈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선자령 바람이 강하기로 유명하다지만 2016년 2월에 경험한 선자령 바람은 여기 바람에 비할 바가 못된다. 산아래에서 사방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텐트가 견뎌주었다. 다행이었다.

6시에 기상해서 8시에 출발하기로 계획을 세웠었다. 용상이가 5시 30분에 일어나고 나 역시 인기척에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며 일출을 찍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리고 등산객이 올라왔다. 이 새벽에 어떻게. 처음에는 서너 명인 줄 알았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계속 올라온 등산객의 수가 20여 명이 넘었다. 젊은 사람들이고 아마도 회원 아이디로 인사하는 것을 보니 모집 산악회 같았다. 일부 여성 등산객들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아침 기온도 영상 4도였다. 아마도 어젯밤에 대절 버스로 출발해서 송계사 정도에서 올라왔으며 2시간 정도 산행했을 텐데 출발할 때 기온을 감안하면 긴바지를 입었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즐거워하던 여성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텐트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다. 짐 정리가 어느 정도 된 경화가 흔쾌히 허락을 해서 텐트 속으로 들어간 그분 왈 “텐트 안이 이렇게 따뜻한지 몰랐다”라고 하면서 다른 반바지 동료도 불러들였다. 서서히 남성 등산객도 나머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회원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데 족히 1시간은 걸렸다. 후미를 기다려주는 것은 장거리 등산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의 복장이었다. 산행 리더가 준비를 제대로 시키지 않았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분도 복장이 가볍게 보였다. 그 사이 우리는 아침을 먹었다. 단체로 기념 촬영을 준비하기에 기념으로 찍어주었다. 이 분들이 지체된 원인도 저체온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들려오는 이야기로 후미에서 쥐(근육경련)가 났다고 했다. 2017년에 일본 중앙알프스에서 한국인 4명이 사망한 조난사고도 기상이변에 의한 저체온증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산행 준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날 아침 강풍으로 무주리조트 곤돌라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반대편에서 오는 등산객들이 들려주었다. 이 일행은 60대 연령으로 30여 명 되는 것 같았다. 곤돌라로 설천봉을 올라 신풍령으로 오는 즉, 우리와 같은 코스를 계획한 것 같은데 곤돌라 운행이 되지 않아 역으로 코스를 잡아 신풍령에서 올라온 것이다. 선두와 후미가 족히 1킬로미터는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후미에는 안내자가 없고 남녀 한분씩인데 딱 봐도 초보자로 보였다. 이때가 11시경인데 오늘 중으로 설천봉까지 갈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전문가라면 코스를 바꾸는 등 상황에 대처하겠지만 초보라면 대응력이 떨어질 텐데. 만약 설천봉에서 하행 곤돌라가 운행을 하지 않는다면 걸어내려 가야 하니 더 큰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데 우리 일행 모두 공감하며 걱정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도 이번 트레킹의 날머리인 빼재(신풍령)에 예정 시각보다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덕유산 능선과 초승달, 2018 © 추보 구자룡



이번 트레킹을 마무리하면서 생각해보니 이렇게 날씨가 좋은 경우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우리 일행들은 대구와 서울과 함양에 흩어져 있고 다들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일기변화에 따른 일정 조정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어쩔 수 없이 그냥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는 대상지역이나 코스를 바꾸어 대처했었다. 이번 덕유산 트레킹은 산이 우리에게 덕을 베푼 것 같아 고마웠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출이나 일몰을 보려면 삼대에 덕을 쌓아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1985년경 박성호를 포함한 후배 네 명과 지리산 종주에 나서서 마지막 밤을 천왕봉 밑에서 야영을 하면서 일몰과 다음날 일출을 보았는데 그때 이후로 제일 좋은 날씨였다. 그런데 어떤 후배는 갈 때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어려움을 호소한다. 방법이 하나 있는데 빠지지 않고 참여하다 보면 좋은 날을 만날 수 있다는 확률을 말해주고 싶다. 인생은 그런 거다. 길을 걸으며 또 다른 길을 본다.

신풍령에서 경화 차량으로 이동하여 김천구미역 근처에서 감자탕으로 맛있게 점심을 함께 먹으며 이번 트레킹을 마무리했다. 지난 겨울 한파 경보로 포기했던 오대산 트레킹을 8월에 기약하며...


글/사진. 구자룡(대간길 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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