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보 구자룡 Jun 01. 2018

서울의 옛 동네, 청파동과 중림동, 만리동의 매력

청파동 기행문

서울의 옛 동네, 청파동과 중림동, 만리동의 매력 


글/사진. 구자룡(골목길 문화인류학자) 


5월 4일 청파동을 처음으로 다녀온 후 쓴 '서울의 옛 동네, 청파동의 매력’이란 기행문이 반향을 일으켰다. 골목길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연구하기로 한 김민주 작가, 홍재화 작가와 브런치에 '골목길 문화인류학'이라는 매거진을 만들었다. 이 매체에 주로 기고하고 이를 확산하는 방안이다. 청파동에 대해 브런치에 기행문을 발행한 후 7일 만에 1만 회 조회수를 돌파했다. 그 와중에 어떤 중년 여성 분이 휴대전화로 “청파동이 그렇게 아름답던가요? 직접 가봤어요?”라고 질문을 했다. 왠지 부정적인 말투와 시비를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연하지만 세 명이 직접 가서 골목길을 둘러보고, 주민과 대화도 하고, 이용원에서 직접 이발도 하면서 체득한 느낌과 저의 가치관, 그리고 마케팅과 브랜딩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견을 피력한 글이다. '서울의 옛 동네, 청파동의 매력’에서 아름답다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 아마도 독자가 아름답게 느낀 것 같아 한편으로 흡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분들도 있어서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다시 한번 인식했다. 우리들은 청파동이나 그 주변 동네와의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정치인들과도 공무원들과도 무관한 사람들이라 편견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했고 또 제시할 예정이다.  


서울역 뒷편 청파동과 그 이웃 동네인 중림동과 봉래동, 그리고 만리동의 매력은 무엇일까? 서울의 역사는 길게는 1,000년, 짧게 잡아도 600년의 역사가 오늘과 연결되어 있다. 서울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더구나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쳐 6·25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압축 성장으로 나타난 서울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다. 그 서울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옛 모습을 유지하거나 혹은 낙후된 동네들이 있고 그곳에 다양한 골목길이 있다. 화려한 서울의 모습 뒤에 감춰졌던 옛날 동네의 매력(?)을 느껴보면서 이 동네를 재생할지, 재개발할지, 활용할지, 등등 고민을 해보기도 한다. 정책입안자도 아니고, 도시설계자도 아니고, 지역 주민도 아닌 나그네의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그곳 주민의 삶이 좋아지면 좋겠고, 서울이 더 매력적인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고, 가볍게 걸어볼 수 있는 골목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와 산업화의 역사가 담긴 건축물들이 많이 있어서 역사공부가 된다.   




옛 서울역과 강우규 의사 

우리나라에 철도가 생기면서 그 중심에 있었던 서울역사는 1925년 9월에 경성역으로 준공되었다. KTX 개통과 함께 그 중심 기능을 새 민자역사에 넘겨주고 이제는 '문화역서울 284'로 명칭이 바뀌어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284가 뭐지?. 명칭을 지을 때 의미 있는 숫자를 사용하는 게 유행인가 보다. 구 서울역사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기에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서 따온 명칭이다. ‘서울로7017’도 같은 맥락인 데 고가도로(자동차전용)로 1970년 건설되어 2017년 새롭게 보행도로로 재탄생했다는 의미인데 이게 잘 전달될까 의문이 든다. 브랜드를 전공한 입장에서 보면 좋은 명칭이라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 좋은 명칭은 특히 공공시설은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발음이 쉽고 리듬이 있어야 회자되기 좋다. 

구 서울역사에 있었던 양식당이 신 서울역사로 옮겨 ‘서울역 그릴’로 재탄생하여 영업을 하고 있다. 정확한 기록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당이라고 한다. 일행들과 함께 돈가스와 생선가스를 주문해서 먹었다. 먼저 수프가 나오고 이어서 본 요리, 그리고 마지막에 커피가 나왔다. 옛날 경양식집의 스타일인데 요즈음은 경험하기 힘든 코스요리다. 100년 전 서울의 유력 인사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본다.   

구 서울역사를 통해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 나 역시 지방으로 내려갈 때 이 역사를 통해 기차를 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19년 강우규 의사가 서울역(경성역)의 전신인 남대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던 곳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한시가 동상에 새겨져 있다. “단두대상에 홀로 서니/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이후 구 서울역사는 대한민국의 아픔과 기쁨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다.   


구 서울역사(문화역서울 284)와 강우규 의사 동상, 2018 © 추보 구자룡


염천교 수제화 거리 

아직도 싸롱화가 있다. 70-80년대 멋쟁이들이 즐겨 신었던 신사화로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구두거리인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경성역(현 서울역)이 생기면서 인근에 피혁 창고가 생기고, 구두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미군들의 중고 전투화를 재활용하여 신사화를 만들기도 했었다. 70-80년대 호황기도 있었지만 9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대부분 30-40년 이상된 구두 장인들이 구두를 직접 만든다. 100% 수제화다. 기성 제품에 익숙한 소비자들은 대체로 수제화는 비싸다고 생각한다. 염천교 구두는 가격이 저렴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젊은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니 그 한계가 바로 느껴진다. 지금도 100여 개의 매장과 공장이 있지만 여기 장인들이 떠나면 그 명맥은 아마도 유지되기 힘들듯하다. 

이곳을 활성화하기 위해 상인들 뿐만 아니라 서울시와 중구청 등 지자체, 그리고 대학, 대학생, 시민 등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100년 가까이 된 낡은 건물에 구두 매장과 공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자체 주차장이 없으며 연계 교통수단이 좋지 않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대부분 10분 정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다. 칠패로는 하루 종일 차량으로 복잡한 도로라 작업을 위한 차량도, 구매를 위한 차량도 잠시 주차하기도 힘들다. 건물 중간 정도에 아담한 카페가 생겨 잠시 휴식하거나 쉬어갈 수 있는 가게가 생긴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유지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의 지속이 필요하다. 2-3년 동안 다양하게 노력하던 모습은 사라진 것 같고 관심도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깝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 2018 © 추보 구자룡


국내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 

약현성당(사적 제252호)은 1892년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명동성당보다 6년 먼저 지어졌다. 성당의 이름은 성당이 위치한 언덕의 이름이 약현(藥峴)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약현에는 고산자 김정호가 살았다고 한다. 중림동, 봉래동, 만리동 일대를 아마도 약현이라 한 것 같다. 이곳은 천주교 수난 때에 44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서소문과 인접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약현성당은 1998년 취객의 방화로 불탔다. 이후 복원공사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하게도 약현성당에서 칠패로를 통해 숭례문(남대문)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숭례문은 2008년 방화에 의해 거의 소실되는 아픔을 겪고 다시 세워졌다. 그 숭례문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의 역사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대부분 사람에 의한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약현성당, 2018 © 추보 구자룡


약현성당 전망대에서 칠패로를 통해 보이는 숭례문, 2018 © 추보 구자룡


성요셉 문화거리와 중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는 어디일까요? 바로 성요셉 아파트다. 성당 신자들을 위해 1971년 준공되었다. 이후 민간에 매각되었다. 건립 당시 골목길을 따라 지어지는 관계로 선형으로 배치되었고, 지형이 경사여서 출입구의 높이가 다른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 가까이 굳건히 서있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고 튼튼하다고 한다. 60여 세대가 살고 있고 주민 대다수는 이곳에서 수십 년간 살아왔다고 한다. 주상복합이니 당연하지만 1층은 상가다. 그중 한 곳이 커피전문점 ‘커피방앗간’이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다가 힘들면 잠시 커피방앗간에 들러 커피를 한 잔해도 좋다. 방앗간이란 콘셉트가 정겹다. 소문이 많이 나서 그런지 장사가 잘 된다. 기존의 상가는 대부분 주민들이 이용하는 가게라면 이곳은 주변의 직장인이 주 고객이다. 바로 옆에 한국경제신문사가 있다. 한국경제신문사에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신문사에 근무하는 사람을 따라 이 골목길과 붙어 있는 흡연구역까지 왔던 기억이 난다. 알면 보이고 모르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과 역사관광마을 등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지만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문화거리, 창고 건물을 이용한 전시 등 재생을 위한 노력과 재개발을 주장하는 의견 등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를 호박 넝쿨이 무성하여 호박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면 조선시대 칠패시장의 연장이라 할 중림시장도 있다. 지금은 일부 어시장 기능을 하는 정도지만 옛 영화가 있었던 시장이다. 이 골목길을 걸으며 낙후된 골목길을 재생 또는 재활성화한다는 생각은 쉬우나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느겼다.   

서소문로 6길(성요셉 문화거리)을 지나 중림로로 나오면 일명 '중리단 길'이 나온다.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배경인 동네다. '서울로7017' 개통과 함께 뜨는 동네가 되었다. 그런데 왜 '중리단 길'일까? '경리단 길'의 아류이다. 차별성을 주기 힘든 이름이다. 지역의 정체성이 녹아있는 독특한 이름이 좋은 이름이다. 이 곳을 서울시에서는 보도를 확대해 '중림로 보행문화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중림로를 건너 경기여상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막다른 곳에 예쁜 계단길(중림로 8길)이 있다. 주민들은 힘들게 오르는 계단 일지 몰라도 나그네에게는 정겨운 계단이다. 최근 도시재생 사업으로 페인트칠을 하고, 그림도 그려 넣었다. 더하여 활짝 핀 장비가 반겨준다. 만리동으로 가는 골목길이고 손기정 체육공원으로 이어진다.  


성요셉 문화거리, 2018 © 추보 구자룡


중림로 8길의 계단길, 2018 © 추보 구자룡


손기정과 기념관, 체육공원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애국의 불이 댕겨진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달리기로 망국의 슬픔을 이겨내고, 대한 남아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인물. 바로 손기정 선수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 정신과 열정과 투혼은 여기 봉래동(현 만리동)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김민주 작가가 물었다. "왜 여기에 손기정 체육공원이 있을까요? 이곳과 손기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동네에 손기정 학생이 살았던 게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땡. 틀렸다. 손기정은 양정고등학교 출신이다. 이 곳은 양정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로 양정고가 목동으로 이전한 이후 교사 일부를 ‘손기정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머지 일부 공간은 체육공원으로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손기정은 압록강에 접한 평북 의주 출신으로 신의주에서 성장했다. 오직 마라톤을 위해 양정고로 유학을 온 것이다. 일본 국적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여 우승했으며 금메달을 땄다.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인 것이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땄다. 이 역시 대단한 결과이다. 

심훈은 <오오, 조선의 남아여!>에서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 등에/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2천 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라고 감격을 토해냈다. 심훈의 마지막 시라고 한다. 공원에는 이 시비와 동상과 월계수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손기정 선수가 부상으로 받은 대왕참나무 묘목을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공간에 기념관을 제외하고 마라톤이나 달리기와 관련된 시설이나 체험 등 활동적인 공간이 없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기념관 내의 한 벽면에는 손기정 선수에게 영향을 준 주변 인물 여덟 명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위대한 영웅은 그냥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음으로 양으로, 물심양면으로 가르침과 도움을 준 많은 조력자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기정기념관, 2018 © 추보 구자룡


손기정 동상과 월계수, 2018 © 추보 구자룡


100년된 점방 개미슈퍼 

청파동에 100년 된 점방이 있다. ‘개미슈퍼'다. 아무리 봐도 슈퍼(supermarket) 같지는 않다. 영어로 슈퍼라고 하면 좀 있어 보인다. 그럴까? 나는 이 경우 점방이 더 정겨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현재의 주인 할머니도 열심히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외국인 고객이 많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손님들과 기념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인쇄한 후 벽보 같이 게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서 먹으로 주인장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 이유가 손님들과 소통하고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누가 인화를 하고 벽보를 만든 지 궁금해서 또 여쭤보니 앞집 액자 사장님이 도와주신다고 한다. 마침 그 사장님이 나오셔서 우리가 왜 왔는지 물었다. 골목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그 사장님은 서계동 재개발 관련 모임의 회장이라고 했다. 청파동과 서계동 재개발과 관련하여 유력 정치인들이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 지역이 오랜기간 재개발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과 쪼개기가 만연하고 평당 3천만 원이라는 땅값 때문에 재개발이 어렵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때 평당 8천만 원까지 간 적도 있단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길거리 벽보에는 '재생 반대' 집회 계획을 전하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이곳 원주민은 개발을 해야 재산권 행사 및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반면에 세입자들은 여기를 떠나야 할 것이다. 100년이 넘는 슈퍼도 사라질 것이다. 이곳의 정다운 문화도 사라질 것이다. 이런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니 또 이해관계가 없으니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다만 재개발을 하든, 도시 재생을 하든, 현재 주민들 삶의 질이 높아지고, 좀 더 쾌적해지고, 재산가치도 올라가는 묘수를 찾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100년이 넘는 점방을 정겹게 계속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개미슈퍼, 2018 © 추보 구자룡


영화세트장이었던 만리시장 

지난번에도 들렸던 서계동의 만리시장은 따지고 보면 역사성은 높지 않다. 원래 있었던 시장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이 떠나면서 상설시장(1968년)이 되었다. 만리재로에서 배문고등학교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청파동 일대를 탐방객 관점에서 접근하면 만리시장은 최고의 휴식과 먹거리, 볼거리 장소로 적합한 곳이다. 서울역에서 청파동을 통해 오든, 중림로에서 손기정 체육공원을 거쳐 오든, 여기쯤 오면 피곤하고 허기도 질 위치이다. 그리고 효창공원 쪽 이든, 공덕동 방향 이든 남은 구간을 고려한다면 휴식과 먹거리, 볼거리가 필요한 지점이다. 더구나 시장이기에 인프라는 어느 정도 되어 있다. 딱 그 지점에서 ‘한 장 빈대떡’ 가게를 발견하고 막걸리와 모둠전으로 목을 축였다. 상가건물 내부에는 비어 있는 가게, 어수선한 배치와 진열(보관)로 구매력이 확 떨어지는 상태라 판단된다. 

처음 왔을 때는 기존의 재래시장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착각했었다. 이 건물이 영화 세트장이 맞다면 철골구조는 아마도 영화 세트장에서 사용했던 시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여기서 영화를 많이 찍었다고 성우이용원 이남열 이발사가 말했는데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 장 빈대떡' 주인장도 영화 세트장으로 들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나타나지 않고 대체로 구전되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이곳에, 비어있는 곳에, 경우에 따라 리모델링과 재배치를 통해 이 공간을 영화 세트장으로 활용되던 그 시절의 애절한 영화를 무료로 상영하거나, 영화와 관련된 소규모 테마파크를 만들거나, 영화 관련 예술제나 모임이나 학습의 장으로 이용하거나, 영화 관련 스타트업의 사무실로 대관하는 등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한다면 어떨까. 기존의 상인들과 새로운 창작, 학습, 관람 공간 간의 조화로 다시 활기를 띠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상점들은 시장 주변의 주민들이 주 고객이다. 여기에 새롭게 유입되어 들어오는 관람객이나 탐방객들의 구매를 자극한다면 소득창출에 조금 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결국 이런 도시재생 활동은 원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소득을 창출할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외지인이 들어와 상업적 이득만 빼먹고 빠지는 그런 과정이 반복되지 않는 방안을 찾으면 좋겠다.  


만리시장 내부, 2018 © 추보 구자룡


만리시장 외부, 2018 © 추보 구자룡



청파동 2차 답사(2018.05.23)

서울 청파동-중림동-만리동 답사 기록(램블러 어플), 2018 © 추보 구자룡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의 옛 동네, 청파동의 매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