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하면 안 됩니다
가사가 가지고 있는 힘은 대단하다.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울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사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는데 숙련자(?)의 팁을 감히 올리자면 상황을 그리면서 들으면 감정을 이해하기 쉽다.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주인공 혹은 제삼자가 된다면 이해하고 표현하기 쉬워진다.
그중에는 가사 속 감성은 좋으나 상황은 반갑지 않은 경우가 있다. 감성에 빠져서 가사 상황을 찾게 된 케이스인데 놀랐다. 감성 폭발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노래를 기록한다.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노래
때는 중학교 3학년이다.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요제가 있었다. 친구 한 명이 다른 녀석과 함께 출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무슨 노래를 부를 거냐고 물어봤다.
"나? 임창정의 소주 한잔"
기억 속에 없는 노래 제목이었는데 그보다 놀란 포인트는 다른 거였다.
"내가 알고 있는 임창정은 배우인데 그 사람이 노래를 불렀다고?"
그냥 작품 속 OST인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찾아보니까 무려 정규 10집 타이틀곡이었다. 충격.. 그 사람이 가수로 10집까지 냈었다니! 근데 난 왜 몰랐지? 이런 생각들로 재생하려다가 멈췄다. 당시 난 아이돌 노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6년 전에 발매된 (내 인식 속) 배우가 부른 노래를 굳이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가요제가 시작되었고 이런저런 무대를 봤다. 드디어 그 친구 팀이 무대에 올랐고 <소주 한잔>이 시작됐다. 바이올린 같은 도입부가 나오고 첫 가사를 들으니까 '꽤 잔잔한 발라드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후렴구가 나왔다.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여보세요 왜 말 안 하니
응? 나 이 노래 왜 알고 있지?
그렇다. 따로 찾아 듣지도 않고 제목도 몰랐지만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노래가 바로 <소주 한잔>이었다.
그 사람은 가수다
딱 그 정도의 충격을 안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난 아이돌 노래가 너무 좋았고 그는 배우라는 인식을 깨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생활을 앞두고 공부에 대한 여러 생각과 중압감 때문에 굳이 찾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고 즐겨보던 모창 능력자를 찾는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즌에 첫 번째로 출연한 '가수'를 보게 된다. 바로 임창정이다. 시즌 1의 흥행 이후 시작된 2번째 시즌의 첫 가수가 가진 의미가 있을 텐데 임창정이라는 것에 대해 놀랐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으로 그 방송을 봤고 이는 최애 가수 갱신을 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요즘과 달리) 당시 마지막 라운드 노래는 가장 대표곡을 하는 게 국룰이었다. 이미 그전 라운드에서 반해버렸기 때문에 '무슨 노래가 나올까?'라는 생각으로 공개된 그 노래를 마주했다. <소주 한잔>이었다. 엄청난 인기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노래를 다 듣고 나서는 내가 알던 그 노래가 아님을 깨달았다.
팬들과 함께 해서도 있겠지만 그 노래를 부른 임창정의 감성과 가창력은 엄청났다. 그 사람은 연기도 잘하는 가수다.
찾아들으며 알게 된 사실
프로그램에서 불렀던 노래는 물론이고 흘러나왔던 노래 등을 찾아보면서 너무 좋은 노래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노래에 대한 몇몇 비하인드 스토리도 알게 되면서 더 빠져들게 됐다. 가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노래 속 감성에 빠져들게 됐다.
술이 한 잔 생각나는 밤
같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좋았던 시절들
이젠 모두 한숨만 되네요
첫 소절부터 가사의 상황이 바로 그려진다. 이별 후 술 한잔하고 있는 밤에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눈앞에 그려졌다. 성인이 된 이후 술을 마셔보고 취해도 보면서 어떤 상태일지 더 느껴졌다.
사람이 변하는걸요
다시 전보다 그댈 원해요
이렇게 취할 때면
꺼져버린 전화를 붙잡고
당시 내가 그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별했는데 지금은 원한다는 걸 인정하면서 후회하고 있다는 게 그려졌다. 그래서 술 한잔을 했고 취해버렸다. 이 얼마나 가슴 절절한 상황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뒷 가사를 보기 전까지...
1절의 '꺼져버린 전화를 붙잡고'와 2절의 '바뀌어버린 전화번호를 누르고'라는 가사를 보니까 그려진 상황이 다르게 보였다. 취했구나...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여보세요 왜 말 안 하니
~
그대를 다시 불러오라고
미친 듯이 울었어
이 가사만 놓고 보면 너무 절절했다. 전화를 걸어 그대에게 매달리고 이별을 후회하고 있다는 걸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후렴 가사의 바로 앞을 보고 나니까 다른 상황이 그려졌다. 술 취해서 민폐를 끼친 거다...
전화를 받은 상대편 입장에서 보면 무서운 상황이다. 모르는 사람이 이별 후 사무치는 후회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를 건 입장에서 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따로 없다. 날 잊지 못하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서 감정을 자제시킨다고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으면서 단 한 번도 슬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의 디테일보다 그 상황 속 감성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사가 가지는 특성이 참 신기하다는 걸 느꼈고 이 가사를 감성으로만 전달한 임창정이라는 가수는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된 노래다.
대부분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 하나하나 모두 나를 끼워 맞추면서 듣지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가사와 100% 일치하는 상황은 흔치 않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감정이 와닿기 때문이다. 가사에 대한 상황 이해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이를 통해 가수가 전달하고 싶은 감정이다. (물론 가사 자체나 상황에서 사회 통념을 거스르는 게 있으면 안 된다.) 그 감정을 통해 공감하고 위로받는 게 노래가 가진 가장 큰 힘이지 않나 생각한다. 가사가 가진 특성을 확실하게 깨닫고 끄적여본다.